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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서 기독교를 전파했던 영명학교와 제일교회의 성경부인과 교사들. 1913년에 촬영한 사진으로 앞줄 오른쪽 3번째가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한 이애라 애국지사이다. 사진=임연철 박사(미국 뉴저지 드류대학교 소장) 이토록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살다간 사람이 있을까? 독립운동가 이애라의 삶을 살펴보면 신이 과연 존재하는지, 조금이라도 긍휼과 공평한 마음이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평생을 죽도록 힘들게 살았고, 이역 멀리 블라디보스톡에서 남편을 만나자마자 세상을 떴다. 일제 경찰의 고문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독립유공자 이애라 애국지사(왼쪽부터), 이규갑 독립유공자 (이애라의 남편), 룰루 프라이 이화학당 교장, 영명학교 앨리스 샤프(사애리시) 선교사. 이애라는 1894년 서울에서 시종을 지낸 이춘식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심숙이었고, 애라(또는 엘라)는 기독교식 이름이다. 아버지가 작고한 뒤 집안이 어려워졌는데 이화학당 룰루 프라이(Lulu E. Frey) 교장이 장학금을 줘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애라는 1912년 공주 영명학교에 재직 중이던 아산 출신 이규갑과 결혼한다. 당시 공주에서 일했던 쉐이퍼(Olga P. Shaffer) 선교사의 기록에 따르면 영명학교 측은 훌륭하게 학생을 가르치는 이규갑이 안정적으로 정착하여 계속 근무해주기를 희망했다. 이런 차원에서 영명학교를 운영하는 샤프(Alice H. Sharp 사애리시) 선교사가 이화학당 교장에게 중매를 요청했다고 한다. 공주의 샤프, 서울의 프라이 선교사 덕분에 이애라-이규갑이 결혼을 하게 된 셈이다. 공주 영명학당의 여학생들, 이애라와 이규갑은 낮에 등교하지 못하는 여자들을 위해 여자야학교를 운영했다. 뒷쪽 원내가 이애라와 남편 이규갑이다. 사진=임연철 박사 1907년에 촬영한 공주영명학교 전경. 앞쪽이 선교사 사택, 뒤쪽은 학교 건물이다. 멀리 공주시내와 금강도 보인다. 영명학교에서 이애라 이규갑 부부는 바쁘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남편은 한문을 가르쳤고, 이애라는 당시 이화학당 출신 다른 교사들처럼 성경과 국어, 영어, 가사 등을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전도뿐 아니라 계몽과 문맹 퇴치도 중요한 목표였다. 1917년 5월에는 여자야학교를 설립했다. 남편 이규갑은 샤프 선교사에게 낮에 학교를 못 오는 여성들을 위해 야학을 개설해달라고 요청했다 모바일 온라인 손오공 릴게임 . 샤프는 이애라가 밤낮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따른 과로를 걱정했으나 두 부부가 강력하게 원해 여성 야간학교를 시작했다. 영명학교 시절 이애라 부부는 아이를 3명 낳았다. 이규갑이 근무했던 평양 남산현교회. 이규갑은 이 교회의 신홍식 목사와 서울로 동행, 3·1운동에 참여했다. 신목사는 같은 감리교 재단인 공주 제일교회에서도 시무했다. 1917년 남편 이규갑이 평양의 기독병원 전도사로 가게 되자 이애라도 평양의 정의여학교로 자리를 옮긴다. 기독병원은 미국 감리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병원으로 과로와 전염병으로 사망한 의료선교사 홀(W. J. Hall)을 기념하여 세웠으며, 기홀(紀忽)병원, 기홀기념병원으로 불렸다. 정의여학교 역시 감리교 선교부가 세운 미션스쿨로 북한의 중등 여성교육을 담당하는 대표적인 사립학교였다. 서울의 이화학당과 정동제일교회, 공주의 영명학교, 평양의 정의여학교와 기독병원 등은 모두 미국 북감리회 선교부가 세운 시설들이었다. 이애라 이국지사가 근무했던 평양의 정의여학교. 1896년 설립된 여학교로 숭의여학교와 더불어 평양지역 근대 여성교육의 요람 역할을 했다, 사진=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정보자료실 일제시대 평양경찰서. 이애라는 3.1운동에 참여, 평양경찰서에 구금됐다. 1919년 이애라와 이규갑 부부는 3·1운동에 참여했다. 이애라는 평양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 평양경찰서에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석방된 뒤에는 남편을 돕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생후 100일도 안 된 막내딸을 안고 남편을 찾아나섰던 이애라는 끔찍한 일을 겪는다. 친척집을 가려고 서울 아현동을 지나다가 애오개에서 일제 헌병과 맞닥뜨렸는데, 헌병이 이애라가 업고 있던 갓난 딸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죽게 한 것이다. 이애라는 헌병대에 붙잡혀 들어갔고, 동행했던 전도부인 유득신이 사체를 거둬 아현고개에 묻어줬다고 한다. 1919년 4월 출범한 한성임시정부의 국민대회 선포문. 이규갑이 한남수 등과 설립을 주도했으며, 이애라도 비밀연락 등을 수행했다. 평정관에 이규갑의 이름이 올라 있다. 자료=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한편 전도사였던 이규갑은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인 신홍식 목사와 함께 상경, 3·1운동에 참여했다 황금성갈갈이 . 신홍식 목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으로 일제에 구속됐다. 이규갑은 구속되거나 부상당한 독립운동가를 위문하고 도왔으며, 한남수 김사국 홍면희 등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임시정부 수립 운동을 시작했다.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가 출범했으며, 집정관총재(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외무부총장(장관) 박용만, 내무부총장 이동녕, 군무부총장 노백린, 재정부총장 이시영 등으로 내각을 구성했다. 이규갑은 13도 대표들이 참여하는 의회(입법부) 및 자문 의결기구인 평정관에 임명됐다. 이규갑은 홍진 등과 함께 기독교계 인사(목사)로서 천도교, 불교 유교 쪽 인사들을 만나 비밀리에 정부 조직을 인선하고 국민대회를 준비하는 등 산파역을 담당했다. 이애라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한 상황에서 남편을 도와 연락을 취하고 3.1운동 때 투옥된 인사를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이규갑은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아내에게는 국내에 남아 여성운동을 벌여달라고 부탁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이규갑은 상해한인청년회와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하다 1919년 7월 도산 안창호의 권유로 상하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충청도 몫의 의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1920년 경에는 중국 헤이룽장성으로 가서, 무장투쟁을 하는 형 이규풍을 만나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한다. 남편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이애라는 국내에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며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독립운동 단체인 애국부인회에 적극 참여했다. 이애라는 공주 아산 천안 수원 등의 교회를 다니며 부인회를 조직하고 모금활동을 벌였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천안의 양대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애라를 끈질기게 감시하고 핍박했다. 남편이 한성임시정부 설립을 주도했고, 이애라가 경기도와 충남 일원을 돌며 애국부인회를 만들어 자금을 모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공주에서 이유도 없이 일제경찰에 체포돼 끌려갔다. 일경이 남편의 행방을 대라며 심하게 고문을 했지만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시댁이 있는 아산으로 피신했다가 크게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두 아이와 함께 숨어 살다가 일경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산으로 피난을 했는데 그곳까지 일경이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급히 도망하다 넘어져 손등을 다치는 통에 뼈를 잘라내는 수술을 해야 했다 모바일 바다이야기 고래 . 이애라는 소련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기 위해 청진을 거쳐 웅기항에 도착했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됐다. 일제시대 웅기항 전경. 일제의 감시와 핍박을 견디다 못한 이애라는 1921년 망명을 결행한다. 두 아들을 데리고 남편 이규갑이 있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한 것이다. 서울에서 경원선 열차를 타고 원산에 도착한 뒤 배편으로 소련과 접경도시인 함경북도 웅기항(현재의 라선시 선봉구역)에 내렸으나 곧바로 일경에 붙잡혔다. 검문을 하던 웅기경찰에게 체포된 것이다. 일경은 이애라를 경찰서에 가둔 채 남편의 행방을 추궁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 건강이 악화돼 사경에 이르렀을 때 기적적으로 의사 조카인 이민호를 만난다. 이규갑의 형 이규풍의 장남인 이민호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으로 3·1운동이 가담했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망명하여 중국과 러시아에서 의술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웅기경찰은 이애라가 심문을 받다가 사망하면 문제가 될까봐 의사를 불렀는데 때마침 웅기에서 개업하고 있던 이민호가 들어왔다. 이민호는 시치미를 뗀 채 숙모인 이애라를 진료한 뒤 경찰에게 "여기(경찰서)에 두면 위독하다"며 민가로 옮겼다. 이민호는 곧바로 이애라 일행을 배편을 통해 블라디보스톡으로 빼돌렸다. 대전지방보훈청은 2018년 5월 이애라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애라는 며칠 지나서 남편 이규갑을 만날 수 있었다. 멀리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남편이 아내와 아들의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찾아온 것이다. 이규갑이 만났을 때 이애라는 피골이 상접한 채 사경을 헤매는 상태였다. 이애라는 3년여 만에 남편을 만나 불과 며칠을 함께 지낸 뒤 숨을 거뒀다. 이애라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이제는 어디 가지 마오. 내가 두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당신을 도우리다!" 이애라의 인생은 비할 수 없이 비극적이다. 남편과 결혼하고 아이들을 가르쳤던 공주 시절을 빼고는 늘 가난과 일제의 감시, 핍박 속에 연명해야 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죽음도 너무 허무하다. 하늘이 왜 이처럼 한 여성의 삶에 온통 고통만 지워줬는지 모르겠다. 박안라 이규풍 이규갑 이애라 이민호 등 5명의 애국지사를 기념하는 오충비도 세워져 있다. 이애라의 시가는 덕수이씨 이순신장군 후손으로 남편 이규갑, 이규갑의 형 이규풍, 이규풍의 아내 오세라와 아들 이민호, 이민호의 아들 이길영, 이규갑과 이규풍의 어머니 박안라 등 7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집안임을 기록해둔다. target="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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