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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걷는 길
한국에서는 일 년에 두어 번, 추석같이 정해진 날에만 조상의 묘를 손질하고 절을 올리고 곧바로 돌아간다. 묘지는 대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자락에 있어 평소에는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다. 공동묘지를 산책하는 일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묘지를 산책하고, 그림을 그리고,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기도 하며 저마다의 시간을 보낸다. 공원과 달리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도,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없어 조용하다.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지붕 없는 박물관과도 같다. 프랑스인들은 창밖으로 묘지가 보이는 아파트를 특별히 선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꺼리지도 않는다. 묘지가 마을 입구나 중앙 광장의 성당 옆에 자리해 늘 일상과 가까이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은 대개 멀리 떨어져 있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두 공간이 이웃처럼 맞닿아 있어, 죽은 이들도 산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한다.
파리에서 가장 큰 페르 라셰즈 묘지
오랜만에 파리 20구에 일이 있어 가게 되었다. 시간도 남고 날씨도 좋아 도시의 소음을 피해 페르 라셰즈 묘지에 들어갔다. 페르 라셰즈 묘지는 1800년대 초 설립된 파리 수도권에서 가장 큰 묘지이다. 그 면적은 약 44헥타르에 달하고 7만 개가 넘는 묘지가 있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공동묘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와 예술 그리고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뒤섞인 하나의 작은 도시와도 같다.
조각 공원 같은 페르 라셰즈 묘지 전경 / 사진. ©정연아
이곳에는 정치, 법률, 여행, 의학, 예술 등 위대한 역사부터 전쟁 같은 인류의 잔혹한 역사까지 세상을 먼저 떠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이 언덕을 걷다 보면 죽음이 머무는 이곳이 어떻게 이토록 생동감 넘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묘지 안을 걷다 보면 단순한 석판부터 화려한 예배당, 흉상과 실물 크기의 조각, 거대한 기념비까지 온갖 형태의 무덤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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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 문, 스테인드글라스, 부조와 천사상까지, 두 세기에 걸친 미의식과 신앙의 변화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일부 구역은 1962년부터 지정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으며, 곳곳의 묘 또한 역사 기념물로 등재되어 있다. 미술사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천천히 걸으며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과 조형물을 하나씩 바라보다 보면, 마치 야외 박물관을 거닐며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드라즈 집안의 묘, 어머니에게 헌정된 펠리컨 조각, 기독교 전설에서 펠리컨은 자신의 내장을 내어 자식들을 먹인다고 전해진다. / 사진. ©정연아
[좌] 쇼팽의 묘 [우] 화가 제리코의 묘 / 사진. ©정연아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만난 마르틴
스마트폰 앱을 켜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유명인의 묘지를 찾아보았다. 처음 찾아간 곳은 프랑스의 국민 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묘지였다. 묘지 앞에 가이드와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앱을 다시 확인해 보니 피아프의 묘 건너편에 화가 모딜리아니(Modigliani) 묘가 있었다. 그런데 앱은 정확한 위치가 아닌 대략적인 위치만 표시해 주어 묘비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찾을 수 있다.
에디트 피아프의 묘 / 사진. ©정연아
한참을 헤매던 중 한 할머니가 “도와드릴까요?”하며 다가왔다.
모딜리아니의 묘를 찾는다고 하자 할머니는 익숙하게 묘지 사이를 지나 나를 그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손에는 오래되어 모서리가 닳고 닳은 페르 라셰즈 가이드북이 들려 있었다. 파리 20구에 산다는 마르틴 할머니에게 이곳은 단순히 산책지가 아니고 곳곳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보물찾기” 같은 놀이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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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모딜리아니의 묘 위에 팬들이 두고 간 선물들 [우] 마르틴 할머니의 가이드북 / 사진. ©정연아
나는 쇼팽, 발자크, 짐 모리슨, 몰리에르, 오스카 와일드 등 유명인들의 묘를 찾아보려 했었지만, 운 좋게 마틴 할머니를 만나 이름조차 생소한 사람들의 묘를 방문하게 되었다.
아픈이를 낮게 해주는 심령술사 본느 마망
벨 에포크 시대의 치유사였던 루피나 노에게라트(Rufina Noeggerath)는 죽은 자와 대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도덕적인 품성과 타고난 선량함, 그리고 끝없는 자선과 박애 정신 때문에 “좋은 엄마”, “본느 마망”이라고 불리웠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병을 앓는 사람들이 그녀의 무덤에서 기적적인 치유를 기대하며 찾아온다고 한다. 화려한 조각도, 유명한 이름도 없는 이 소박한 무덤에 병이 낫기를 소망하며 누군가가 마로니에 열매를 나란히 올려 놓았다. 본느 마망은 백 년이 넘은 지금도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를 받아주고 있다.
본느 마망의 묘 / 사진. ©정연아
영혼의 안내자, 알랑 카르덱
리옹에서 태어난 교육자이자 번역가였던 이폴리트 레옹 드니자르 리바이유(Hippolyte Léon DENISART-RIVAIL)는, “알랑 카르덱”(Allan Kardec) 이라는 필명으로 근대 스피리티즘(심령주의)을 체계화한 인물이다. 그의 무덤은 제자들이 켈트족의 거석을 본떠 세운 거대한 고인돌 형태이며, 그 안에 그의 청동 흉상이 놓여 있다.
카르덱의 무덤은 그가 사망한 지 1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페르 라셰즈에서 가장 많은 생화가 놓여 있는 무덤 중 하나이다. 그는 생전에 "내가 죽은 뒤 내 무덤에 손을 얹고 소원을 빌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꽃을 가지고 나를 다시 찾아 와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묘 앞에 많은 생화가 놓여 있는 걸 보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알랑 카르덱의 묘 / 사진. ©정연아
다산과 행운을 비는 은밀한 의식, 빅토르 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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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이었던 빅토르 누아르(Victor Noir)는 1870년 결투의 입회인으로 갔다가 나폴레옹 3세의 사촌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의 누워있는 청동 상은 총에 맞아 쓰러져 숨진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모습이다. 조각의 바지 속 남성 생식기 부분이 지나치게 두드러져, 그곳을 만지거나 문지르면 정력과 다산에 도움이 된다는 속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방문객들은 조각상의 발이나 코, 턱과 입술 등에 입을 맞추거나 만지며 각기 다른 소원을 빈다고 한다. 사랑을 찾기 위해 발을 만지거나, 임신과 다산을 기원하며 조각상 주변에 아이 신발을 놓아두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수많은 방문객이 특정 부위를 만지고 입을 맞춘 탓에 청동 표면은 다른 부분보다 눈에 띄게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다.
빅토르 누아르의 묘 / 사진. ©정연아
페르 라셰즈를 사랑하는 사람들
묘지를 잘 알고 있는 마르틴 할머니도 가끔 길을 잃었다. 그때마다 지도를 펼쳐 들고 방향을 확인했다. 그러던 중 커다란 지도를 들고 있는 티에리 할아버지를 만났다. 직접 그린 지도에는 묘지 곳곳의 위치가 빼곡하게 표시되어 있었고, 노트에도 무언가 빈틈없이 적혀 있었다.
캐나다에서 가족들이 곧 이곳을 방문할 예정이라, 직접 안내하기 위해 45일째 묘지를 찾아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마르틴 할머니와 티에리 할아버지 / 사진. ©정연아
페르 라셰즈를 사랑하고 보존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러나 관리되지 않은 무덤들은 오랜 세월과 비바람 속에서 .. 파손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도굴꾼들이 조각과 철재 문, 스테인드 글래스 등을 훔쳐가 안이 텅 빈 무덤들도 많다.
도난과 파손된 무덤들 / 사진. ©정연아
페르 라셰즈는 그저 걷고 싶어서 찾아도 좋은 곳이다. 계획에 없던 골목, 우연히 마주친 고양이, 낯선 이름의 묘비, 몇 번을 다시 찾아도 늘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곳이 페르 라셰즈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 / 사진. ©정연아
파리=정연아 패션&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
몇 번을 다시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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