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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을 만나려면 정읍이나 공주 정도쯤 멀리 가야 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수도권에서 반나절 나들이로도 '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호수인 듯 바다인 듯 평화로운 평택강, 그 강변 언덕길에 하얗게 가을 눈이 내린 구절초의 사연을 만날 수 있습니다.
10월 초에 서둘러 걸음을 하셨던 분들은 꽃이 덜 피어서 헛헛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찬 서리가 내리고 난 지금, 구절초는 순백의 절정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 구절초 군락지 찬 서리가 내리고 난 늦가을에 아홉마디 순백으로 피어나는 구절초
ⓒ 이철원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제가 구절초를 '님'이라 표현한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무슨 사연이냐고요?
우선 시 한 편 감상해 볼까요.
- 구절초 / 박용래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춧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추분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오싹한 전율이 엄습했습니다. "아, 누군가 세상을 떠났구나..."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하직한 것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리 그리움이 절절할 수 있을까요.
▲ 구절초 소녀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 이철원
하염 없이 눈물만 흘리던 울보 시인 박용래
그래서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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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어릴 적 어머니가 연로하셨던 탓에 열 살 위 누나의 손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 누이가 강 건너 마을로 시집을 가던 날 "단장도 없이 눈썹만 그린 채 하이힐을 신고 목선을 타고 건너갔다"고 시인은 시를 통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첫 출산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당시 운동을 좋아하고 목소리도 우렁차고 씩씩해서 강경상업고등학교 대대장까지 맡았던 청년 박용래는 그날 이후 말수를 잃고 '울보'가 되었습니다. 눈물로 지새운 청춘의 길목에서 써 내려간 시가 바로 이 <구절초>입니다.
동료 시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시인은 평소 울지 않고 있는 시간보다 눈물 흘리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상고 수석 졸업 후 은행에 취직했지만 창구에서 연신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직장을 그만두었고, 이후 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도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교단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구절초는 그런 꽃이었습니다. 가슴 저미는 그리움과 눈물이 차마 강물 위로 흐르지 못하고, 강바닥 깊은 곳으로 숨어 흐르는 서글픈 사연의 꽃이었습니다.
▲ 눈물로 쓴 시 '구절초'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 이철원
척박한 바위 능선과 무덤가에 피어나는 순백의 들국화
흔히 들국화로 불리기도 하는 구절초는 배수가 잘되는 척박한 토양을 좋아합니다. 바람이 강해 낙엽조차 쌓이지 않는 산등성이, 도깨비불이 스러지는 외로운 무덤가나 척박한 비탈길에서 꿋꿋하게 피어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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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는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여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추분이 지나고 서리가 내리면, 처음에는 수줍은 연분홍빛으로 모습을 드러내다가 가을이 깊어질수록 순백색 꽃잎으로 피어납니다.
줄기 하나에 단정하게 한송이 꽃이 핍니다. 그래서 바람에 일렁이는 여린 몸짓을 두고 시인은 단정하게 하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을 떠올렸나 봅니다.
사연을 전하다 보니 길어졌군요.
이제부터는 사진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사진으로 만나는 구절초 군락지와 내리문화공원
▲ 눈 부신 구절초 언덕길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하얀 메밀꽃밭의 그윽한 풍경을 "소금을 뿌린 듯"이라 하였지요. 구절초 언덕은 소금 대신 "팝콘을 뿌려놓은 듯" 합니다. 허생원이나 시인이나 일평생의 그리움은 하얗게 피는 모양입니다.
ⓒ 이철원
구절초동산에서 바라보는 평택강
ⓒ 이철원
▲ 구절초 찾은 청띠신선나비와 토종꿀벌 오늘 한국인의 토종 밥상이자 전원 풍경 같았던 최불암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습니다. 최불암 선생님은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고 하셨는데... '구절초 인생'은 연극인가요? 배우인가요? 선생님의 영전에 나비가 찾아 온 구절초 한송이를 바칩니다.
ⓒ 이철원
▲ 들국화 구절초 & 들꽃 민들레 한 흙에서 만나는 가을 구절초꽃, 그리고 민들레 뿌리
ⓒ 이철원
▲ 메타세쿼이아는 덤 구절초동산에서 강변 산책로를 걷다 보면 가을로 물드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만납니다
ⓒ 이철원
▲ 핑크뮬리도 득템 강변뷰를 배경으로 몽환적인 핑크빛 물결을 선사합니다
ⓒ 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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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건너 노을 구절초동산에서 팽성대교를 건너면 강마을 어부들의 작은 포구가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 죽어갈 듯한 붉은 사연이 잔잔한 강물 속으로 내려앉습니다
ⓒ 이철원
여행 정보 안내
☞ 위치: 경기 평택시 팽성읍 내리1길 16-6 (내리 260) 내리문화공원
☞주차: 내리문화공원 주차장
☞주의: 네비게이션이 '내리캠핑장'으로 안내하는 경우가 많아요. 캠핑장은 별도의 통제구역입니다. 200미터쯤 안쪽으로 더 들어오시면 '공원 주차장'에 주차 가능합니다. 주말 휴일은 도로변 주차 가능
☞버스: 평택역 순환121번(평택대, 안정리 경유. 내리마을회관 정류장 이용. 약100분 간격, 1대 운행)
☞화장실: 공원주차장 아래 화장실, 캠핑장 관리사무실 화장실(사용 가능)
에필로그
▲ 서리 맞은 빨간고추를 다듬는 노포 묵집 할머니 "도토리묵은 쌉싸부리해야 제 맛이쥬"
ⓒ 이철원
"구절초 지더라도 가을은 쌉싸부리하게 남아..."
돌아오는 길, 강 건너 창내리 마을 밭에서 서리 맞은 고추를 다듬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고추가 빨간 꽃이 핀 듯 예쁘네요" 하고 말을 걸었더니, "탄저병을 해서야 서리 맞혀서 대듬는다야" 하고 답을 하십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 일행이 찾고 있는 이 동네 오래된 묵집의 1대 주인장이셨습니다. 와~ 바로 그 할머니셨구나! 60년 가까이 도토리묵을 쑤어 왔다는 김복순 할머니는 평택 지방 특유의 충청도식 사투리로 말합니다.
"도토리묵은 쌉싸부리해야 제 맛이쥬."
가을이 가더라도 구절초는 남아 있거나, 구절초 지더라도 가을아 너는 쌉싸부리하게 남아 있거나,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구절초와 가을이 한꺼번에 스러져 간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사연을 만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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