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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반전의 세계사’] 독재 정권 어린이 영웅들의 민낯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청소년 영웅, 순교자 신화는 프랑스 혁명기의 자코뱅이 시작했다. 사진은 프랑스 혁명의 소년 영웅 조제프 바라의 죽음을 묘사하고 있는 장 조제프 베르츠의 작품 ‘바라의 죽음’. [사진 위키백과]
그를 생각하면 아직도 짠하다. 이승복은 나와 동갑이다. 1968년 12월 9일 강원도 산골의 분교 2학년 이승복(1959~68) 어린이는 북한의 무장 공비에게 무참히 살해됐다. 아홉 번째 생일날이었다. 같이 집에 있던 어머니·남동생·여동생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보도에 따르면, 승복군의 어머니가 삶아 준 강냉이를 먹은 공비들은 안방에 가족 5명을 모아놓고 북한 체제를 선전했다. 이때 문제가 발생했다. 아홉 살 승복이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항거한 것이다. 공비들은 이승복의 “입버릇을 고쳐주겠다”며 양 손가락을 입에 넣어 찢은 다음 돌로 내리쳐 죽였다. 잔혹하게 살해된 시신은 너무 참혹해서, 보는 이의 눈을 돌리게 했다.
가난한 대한민국 안에서도 가난하기 짝이 없는 이 프롤레타리아 가족이 공산주의 게릴라에게 참혹하게 살해된 것은 역사적 부조리극의 한 장면 같다. 아홉 살 어린 소년이 무장공비의 위협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그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홉 살짜리 어린이가 추상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인가. 그 어린 소년의 억울한 죽음을 의연한 결단으로 신성화하고 곳곳의 초등학교에 소년의 동상을 세우고 대규모의 기념관을 만드는 사회는 또 어떤 사회인가. 권력의 관.에서 볼 때, 모든 국민이 이 어린이만 같다면 만사형통이다. 초등학교 교육커리큘럼에서부터 어린이 영웅이 자꾸 등장하는 이유이다.
북한 무장공비에 살해된 이승복은 반공의 상징으로 학교 곳곳에 동상이 세워졌다. [중앙포토]
남한의 반공독재 시대 이승복이 어른의 모범이었다면, 북한에서는 14세 소녀 한현경이 그랬다.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지 불과 반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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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1일 새벽 “산사태가 났다”는 외침에 잠이 깬 소녀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비닐 보자기에 싸서 소중히 챙겨 나오느라 대피 타이밍을 놓쳐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북의 보도에 따르면, 초상화를 가슴에 꼭 껴안은 채 시신으로 발견된 소녀의 얼굴은 군데군데 찢겨 있었지만 품속의 초상화에는 습기 한 . 스며들지 않은 상태였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고 한현경에게 ‘김정일청년영예상’을 추서했다. 또 부모와 교장, 교감, 담임교원, 소년단 지도교원에게도 각각 훈장을 수여했다. 그가 다니던 중학교는 ‘한현경 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김정은 제1비서는 목숨을 소중히 하라는 말 대신, ‘기특한 어린이’라고 소녀의 죽음을 칭찬했다. 북한 교육 당국은 2013년 도덕 교과서를 개정해 한현경을 ‘수령 결사옹위의 모범’으로 선정했다. 지도자의 초상화를 홍수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한현경의 이미지는 수령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청소년에 대한 북한 당국의 판타지를 잘 보여준다.
스탈린 치하 소련의 어린이 영웅 모로조프(Pavlik Morozov)는 이승복과 한현경의 대선배였다. 모로조프는 자기 친부가 국가의 적인 부농들에게 신분증이나 서류를 위조해주고 곡물을 받는 ‘부당’ 행위를 했다고 공안기관에 고발했다. 아버지는 결국 처형되었는데, 아버지를 고발한 데 분개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등이 모로조프 형제를 숲으로 끌고 가 죽였다. 모로조프를 죽인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사촌 형 등도 살인죄로 처형되었다.
스탈린 시대 소련 문학계의 황제 막심 고리키는 “가까운 혈육도 쉽사리 사상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 소년”이라고 모로조프를 추켜세웠다. 고리키가 소련 작가들에게 내린 창작 지침은, 소년단원 피오네리(구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서 운영했던 사회주의 소년단 조직이자 그 단원) 이미지와 맞는 사회주의 어린이의 모범적 전형을 모로조프에게서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로조프는 소년단원도 아니었고 품행이 방정한 모범 학생은 더더욱 아니었다. 고발 동기도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라는 정황도 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모로조프를 이어 어린이 고발 영웅들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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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 시대 소련에서 고발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친지에게 피살된 어린이 숫자는 공식 통계로만 56명에 달했다. “보아라! 달려라! 고발하라!”는 슬로건 아래 피오네리 소년단이 소련 곳곳을 헤치고 다니자, 스탈린주의는 개별 가정의 사적 영역 깊은 곳까지 침투했다.
중국의 모로조프들은 마오쩌둥의 엄호 아래 더 기세등등했다. 1970년 2월, 16세의 홍위병 장홍빙은 어머니 팡중머우가 집에서 마오를 비판하는 말을 하자 혁명위원회에 고발했다. 홍위병의 모반 혁명에 열광한 ‘붉은 병사’라는 뜻의 ‘홍빙’(紅兵)으로 이름까지 바꾸었다. 그의 어머니는 공개적 자아비판 끝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1966년 여름 마오는 “반란은 정당하다” “본부를 포격하라”는 등의 메시지를 홍위병들에게 전달했고, 홍위병들은 그해 8~9월 두 달 사이에 베이징에서만 1800명을 살해하고 수천 명을 구타하고 고문했다. “청년에게 길을 비켜라”라는 구호를 선창한 것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이었지만, 기성세대를 옆으로 밀어내고 제도 밖의 폭력을 주도한 것은 마오의 홍위병들이었다.
박학다식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탈리아의 석학 움베르토 에코는 1942년 열 살의 나이에 전국 파시스트 청소년 글짓기 경연대회에서 일등상을 받았다. 작문의 시제는 ‘무솔리니의 영광과 이탈리아의 불멸의 운명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죽어야 하는가’였는데, 에코는 능수능란하게 수사를 동원해 ‘그렇다’고 정답을 써서 장원을 차지했다.
“나는 영리한 아이였다”는 자조적 결말은 체제의 강요 속에서 일등상을 받은 자신의 글짓기가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능동적으로 수행했다는 복선을 깔고 있다. 실제로 에코는 70대 중반에 접어들어서도 자신의 열 살 때 얼굴 사진이 붙어 있는 파시스트 청소년 조직 ‘발릴라’ 회원증을 파시즘 시대에 나온 어린이책 서가 한가운데에 진열해 놓고 있었다. 파시스트 소년 영웅에 대한 경고였을 것이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청소년 영웅, 순교자 신화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남북한의 개발독재 등에 앞서 프랑스 혁명기의 자코뱅이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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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Francois Joseph Bara)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혁명군에 자원입대해 ‘북 치는 소년’으로 복무했는데, 14세 되던 해 말을 훔치려는 왕당파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보고에 접한 로베스피에르는 즉시 이 사건의 선전 가치를 알아채고 완전히 다른 서사를 만들었다. 왕당파가 “국왕 만세”를 외치면 살려준다고 했는데, 바라가 “공화국 만세”를 외쳐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바라를 팡테옹에 안장하는 이벤트를 기획했지만, 테르미도르 반동(1794년 7월 27일(프랑스 혁명력 테르미도르 9일) 로베스피에르 등 자코뱅파가 몰락한 사건)으로 처형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990년대까지 초등학교에 다닌 세대는 모두 바다를 막은 둑에 난 작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밤새 막아 마을과 나라를 구한 네덜란드 소년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정작 네덜란드에는 이 이야기가 없다. 원래 이 이야기는 1865년 미국 아동작가 닷지의 소설에 ‘극중극’의 형태로 삽입된 에피소드였다.
1897년 편찬된 일본의 고등 소학교용 국민 독본 교과서가 이 이야기를 실었고, 일본 제국에서 해방된 포스트식민주의 한국의 교과서가 메이지 일본의 국민 만들기를 그대로 본떴다. 남북전쟁기의 미국이나 일본 제국, 해방된 국민국가 대한민국이 모두 조국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모범 소년을 사랑한 것이다.
좌파와 우파,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어린이 영웅은 개인의 생명보다 국가와 집단의 안녕이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서사적 도구였다. 어른들이 만든 국가와 사회의 문제 해결을 어린이 영웅과 희생의 미학으로 치환하고 어린이 독자들의 눈물과 죄책감을 자극하는 이러한 서사구조는 어른들의 뻔뻔한 민낯을 가리는 얄팍한 꼼수였다.
프랑스혁명 이래 어린이 영웅이나 순교자를 통해 국가 위기를 봉합하고 미래세대를 더 순수하고 헌신적인 국민으로 훈육하는 ‘인간 혁명’ 프로젝트는 모든 근대 권력의 꿈이었다. 하지만, 권력이 자기보다 훨씬 복잡한 인간을 혁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혁명’ 프로젝트가 실패하리라는 것은 권력자만 빼고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진짜 혁명은 ‘인간혁명’에 반하는 혁명이 아닐까.
임지현 서강대 석좌교수. 서강대에서 서양사 전공. 대표 저서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2021), 『기억 전쟁』(2019), 『대중 독재』(2004), 『우리 안의 파시즘』(공저 1999) 등이 있다.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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