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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동시에 지역의 유지를 선발하여 민심을 무마하려 했다. 일제에 충성하거나 호의적인 유력자들이 지방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설득하고 여론을 통제한 것이다. 이렇게 선발한 사람들을 일제는 '임시사무촉탁원(臨時事務囑託員)'이라고 하였으며, 비밀리에 6월 4일(제289호) 처음 보고하였으며 동년 9월 20일 다시 보고하였다. 경기도에서는 총 29명과 대정친목회 2명의 임시사무촉탁원이 선발되었다. 명단과 주소는 아래와 같다. ▲ 임시사무촉탁원 이름과 주소 경기도지사 공등영일(工藤英一)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인 수야동태랑(水野?太郞)에게 1919년 09월 20일인심 안정에 관한 건(人心ノ安定ニ關スル件)이라는 제목으로 공문서를 보냈다. 여기에 경기도 내 29명의 지역유력자들과 대정친목회 2명의 이름과 주소가 들어있다. 부천군에서는 이계현, 박교문, 김포군에서는 기동식이 있었다 ⓒ 국사편찬위(한국사데이타베이스) 위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10일 미만으로 활동한 사람이 12명, 10일에서 19일 사이를 활동한 사람이 11명, 20일에서 29일 사이를 활동한 사람이 7명 그리고 30일 이상 활동한 사람이 1명이었다. 가장 짧게 활동한 사람들은 가평군의 이익승과 정학영이었으며, 가장 오랜 기간 활동한 사람은 수원군의 우성현이었다. 지역의 3.1혁명 양상에 따라 활동 기간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부천군 출신인 이계현은 11일, 박교문은 13일 활동하였으며, 이웃 마을인 김포군 기동식과 김중기는 13일 활동하였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두명있다. 바로 부천군 계남면 소사리 출신의 이계현과 김포군 고촌면 향산리 출신의 기동식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대한제국 관원 출신으로 이계현은 육군보병참위(陸軍步兵參尉)이었으며, 기동식은 한성 지방위원회 위원이었다. 대한제국 관원 출신이면 그 누구보다 시대의 변화를 알고 국가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공직자는 그 누구보다 국가로부터 받은 혜택이 많기 때문에 어려움에 당하면 일반 시민들보다 더 헌신해야하는게 도리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지역에서 일제에 적극협력한 조력자가 되었다. 이들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한다. 이계현(李啓賢) 이계현은 1883년 6월 22일 태어났으며 18세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2년 7월 6일에 졸업하였다. 육군보병참위(陸軍步兵參尉)를 지낸 후 1909년 부평군 옥산면 소사리(부천군 계남면 소사리)에서 서상대(徐相大), 윤백헌(尹百憲) 등과 함께 사립 계남학교를 만들었다. 1917년 5월에는 소사금융조합장이 되었으며, 1919년과 1920년에는 부천군청 군참사(郡參事)를 지냈다. 1923년 7월에는 부평수리조합 부조합장에 취임하였으며, 1924년 4월에는 부천군 학교평의원이 되었다. 1925년 1월 8일 소사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할 때 기성회장을 하였으며, 1924년 11월에는 한익선, 민병수와 함께 소사산미조합(素砂産米組合)을 창립하였다. 1926년 계남면 부민회 고문이 되었고, 1927년에는 경기도 평의원이 되었다. 1931년 2월 17일 사망하였다. ▲ 문서제목<人心ノ安定ニ關スル件>(1919년 09월 20일)에서의 이계현 이름과 주소 이계현은 1919년 3.1혁명 이후 일제에 의해 임시사무촉탁원에 임명되어 민심을 무마시키는데 활동하였다. 이 당시 주소는 계남면 소사리로 현재의 소사본동이다. 이계현은 소사리 땅의 많은 양을 소유하고 있는 지역유지였다 ⓒ 국사편찬위원회 기동식(奇東式) 기동식 김포군 고촌면 향산리 출신으로 1903년 홍순칠(洪淳七)과 함께 법부주사(法部主事)를 하였으며, 1907년에는 정공조, 변홍기, 석동환, 이동현, 이명승, 기동식, 심능원, 김응환, 서상빈, 박희병, 김연성, 이세용, 심원형, 황세련, 박제근, 경훈중 등과 함께 한성 지방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1909년 11월 이토히로부미가 안중근의사의 저격에 의해 하얼빈에서 사망하자 일부 한국인들은 일왕에게 사죄하기 위해 '국민사죄단(國民謝罪團)'을 만들었는데, 회의에 기동식은 김포군을 그리고 박희병은 부평군을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그해 12월 25일 <合邦 문제에 관한 各地의 그 후 상황(문서번호高秘發第四七五號)>에서 기동식은 "韓日合邦은 가장 옳다. 한국은 장래 독립 자존할 가망이 없으며, 국가의 면목을 새롭게 하여 각반의 개선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이 기회에 오히려 합방하느니만 못하다"라고 말하였다. 대한제국 관원이면서 한일강제병합을 적극 지지하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1908년 지역 유지들과 함께 향산리에 사립금란학교(私立金蘭學校)를 설립하고 1909년 7월 30일 당국의 인가 획득하여 8월 15일 개교하고 자신이 무보수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1년 7월 군참사(郡參事)가 되어 4년간 재직하였으며 1914년에는 경기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이 되었다. 1913년 11월에는 김포금융조합장(金浦金融組合長)에 취임하여 15년간 근무하였다. 1935년에는 농촌진흥회장(農村振興會長)을 역임하였다. 이처럼 화려한 활동으로 1918년 도장관으로 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1922년에는 기념품을 받았다. 1931년에는 지주동맹을 조직하였으며, 1935년 시정25주년기념(始政25周年記念)으로 표창을 받았다. 1938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1918년 4월 21일 매일신보의 기동식 표창 기사 기동식은 김포군 고촌면 향산리에 사립금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활동을 하고, 동시에 미풍양속을 개선하고, 지방 산업을 개선하였다고하여 도장관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김포군수 주관으로 은배와 표창을 받았으며, 각 관원과 면 유력자 및 학교생도 등 400여명이 참석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 국립중앙도서관(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이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이전에 지역에 교육기관을 설립한 공통.이 있다. 이 당시 전국적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사립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해 실력을 쌓고 국난을 극복하자고한 의지를 보였다. 이들의 행적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으나 그 이후의 행적을 보면 전혀 그렇지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지역에 쌓은 부를 통해 군참사, 금융조합장 등을 하였으며, 특히 3.1혁명 이후 임시사무촉탁원을 하여 다수 민중의 의지에 역행하는 행위를 하였다. 이들의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며 지역 역사기관이 더 연구하여 시민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21일 매일신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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