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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아,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안 좋은데."
초등학교 6학년 지훈이(가명)는 태블릿 화면을 슬쩍 가렸다.
"아뇨. 그냥요."
"친구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별일 없어요."
15년째 학원과 방문 과외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예전에는 학교 이야기를 늘어놓느라 수업을 시작하기 어려운 날도 있었다. 요즘은 "그냥요", "몰라요"라는 대답만 돌아오는 아이들을 종종 만난다.
그런데 지훈이를 가르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아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책상 위 태블릿에 AI와 나눈 대화가 열려 있었다. 체육 시간에 피구를 하다가 친구들이 자신에게만 공을 던져 속상했다는 이야기였다. AI는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말로 답했고, 아이는 대화하니 조금 편해진다고 했다.
남의 일기를 허락 없이 들여다본 것 같았다. 화면이 열려 있었다고 교사에게 사적인 대화를 읽을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는 말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어른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를 AI에게 하고 있었다.
"엄마한테 말하면 또 뭐라 하잖아요"
나중에 지훈이에게 AI와 어른의 차이를 물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친구 이야기를 하면 자신이 먼저 잘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선생님에게 말해도 다음에는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했다.
"근데 AI는 그냥 제 말 들어주잖아요. 제가 잘못했다고 안 하니까 편해요."
초등학교 5학년 유진이(가명)는 학교 선생님에게 속상한 일을 털어놓았다가 어머니가 알게 된 경험이 있었다.
"선생님한테 말하면 엄마가 다 알잖아요. AI는 엄마한테 말 안 하니까요."
두 아이에게 AI는 검색 도구가 아니었다. 잔소리나 비밀이 전달될 걱정 없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상대였다.하지만 듣기 싫은 말을 하지 않는 상대가 반드시 필요한 말을 해주는 상대는 아니다. 아이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것과 판단을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지훈이는 친구들이 자신에게만 공을 던졌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친구들의 의도나 아이가 보지 못한 상황은 알 수 없다. AI 역시 아이가 입력한 이야기만 알고 있다.
AI가 지나치게 동조한다면 아이는 억울함을 인정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판단까지 옳다고 확신할 수 있다.
2026년 3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Science>에 발표된 스탠퍼드대 연구에서 AI 모델 11개는 인간보다 이용자의 행동에 평균 49% 더 자주 동조했다. 2,405명이 참여한 실험에서는 과도하게 동조하는 AI와 대화한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을 더 확신하고, 갈등 상대에게 사과하거나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향은 낮아졌다.
한국 초등학생에게도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듣기 좋은 대답이 언제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는 마음을 이해 받는 경험과 함께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고, 잘못을 인정하며 갈등을 해결하는 경험도 필요하다. 친구에게 사과하거나 하기 싫은 숙제를 끝내면서 행동에 책임지는 법을 배운다.
AI가 반드시 이런 경험을 빼앗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가 불편한 말을 피하고 원하는 대답만 찾게 된다면 그 영향은 살펴봐야 한다.
"AI까지 못 하게 하면 아예 말을 안 할까 봐요"
지훈이 어머니와 상담하던 날이었다.
"선생님, 요즘 지훈이가 방에 들어가면 AI하고 몇 시간씩 대화해요."
처음에는 공부하다 모르는 문제를 질문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과 속마음까지 AI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저한테는 아무 일 없다고만 하거든요. 그런데 AI한테는 별 얘기를 다 해요. 이러다가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도 어려워지는 건 아닌가 싶어요."
어머니는 AI에 지나치게 의지할까 걱정하면서도 태블릿을 강제로 빼앗고 싶어 하지 않았다.
"AI까지 못 하게 하면 아예 말을 안 할까 봐요"
AI와 오래 대화한다고 사회성이 떨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의 반발을 우려해 생활의 기준조차 세우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교육의 문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25년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에서 만 10~19세 청소년의 과의존 위험군 비율은 43%였다. AI 상담 의존율은 아니지만, 디지털 기기 사용 조절이 많은 가정의 과제임을 보여준다.
지난 5월 KBS <추적60분>은 '모두가 자식의 폰과 싸우고 있다' 편에서 청소년의 스마트폰 사용 문제를 다뤘다. 방송에 출연한 허지원 대표는 저서 <세상에 나쁜 사춘기는 없다>에서 공감만으로 행동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일관된 규칙과 생활 관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아이의 마음을 존중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모두 허용하는 것은 다르다. 갈등을 피하려고 약속을 계속 바꾸거나, 반대로 아이의 말을 듣지 않고 기기를 빼앗는 방식 모두 문제가 될 수 있다.
부모가 이런 갈등을 감당하는 동안 디지털 서비스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과 대화 상대를 제공한다. 기업에는 이용자가 오래 머무를수록 유리한 사업 구조가 존재할 수 있다. 가정의 교육적 목표와 기업의 상업적 목표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공감은 필요하지만, 기준까지 사라져서는 안 된다
15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설명을 많이 한다고 반드시 행동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숙제를 하지 않은 아이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길게 설명해도 같은 일이 반복되곤 한다. 반면 해야 할 분량과 시간을 정하고 확인하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기 쉬워진다.AI 사용도 무조건 끊게 하기보다 잠자는 시간과 공부하는 시간에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기준을 함께 정하고 일관되게 지키는 편이 낫다.
대화 내용을 몰래 확인하기보다는 AI가 어떤 말을 해줄 때 도움이 되는지 물어볼 수 있다. 아이가 원한다면 답변을 함께 살펴보며 친구의 입장이나 AI가 모르는 사실에 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
아이의 감정은 인정하되 행동의 책임까지 면제해서는 안 된다. 친구 때문에 화가 났다는 사실과 친구에게 함부로 행동해도 된다는 판단은 별개다.
유진이가 AI를 믿는 이유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이는 AI가 비밀을 지켜준다고 느끼지만, 서비스에 따라 대화 기록이 저장되거나 검토될 수 있다. 일기장처럼 느껴지는 대화창이 실제로는 기업이 운영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심각한 고민에 AI가 위험 신호를 놓치거나 부적절하게 답할 가능성도 있다. 미성년자의 개인정보 보호와 안전한 응답 체계에는 기업과 정책 당국의 책임도 따른다.
아이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해줄 사람
지훈이가 AI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편을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듣고 교사로서 아이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있었는지 돌아봤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주는 것만으로 교육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말하고, 사과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며,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가 반발하더라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어른이어야 한다.AI는 아이가 원하는 순간 대답하고, 원하지 않으면 대화를 끝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자신의 말을 고치며, 갈등이 생기면 다시 마주 앉아야 한다.
15년 전에는 학생들이 학교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 수업 진도를 걱정했다. 지금은 아이가 아무 말 없이 문제집을 풀고 돌아가는 날이면, 그 고민을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공감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공감 이후에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생각하는 일이다. AI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대일수록, 어른은 아이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까지 책임 있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감사합니다 ❤️
님한테 말하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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