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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는 다른 업무 하고 싶어요." 업무 보고를 마치고 일어서려던 그가 다시 앉으며 한 말이었다. 그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몇 번을 삼켰을지, 짐작이 갔다. 올해만 세 번째였다. 찾아온 사람도, 자리도 달랐지만 뜻은 하나였다. 교장실 에어컨은 웬만해선 켜지 않는다. 잠깐 들르는 이들에게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마음대로 정해둔 탓이다. 그날도 그랬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등줄기로 더위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리모컨을 집어 들지 않았다. 남의 고통을 내 기준으로 짐작해버리는 습관. 생각해보면 그날 들은 말은 나의 그 무심함과 정확히 닮아 있었다. 부하는 언제나 덜 버티는 쪽으로 쏠린다. 사람이 만든 조직도 이 이치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날 나는 그것을 숫자가 아니라 목소리로 확인했다. 나 혼자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 ▲ 교무실의 온도 분포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인데 한 자리만 붉다. 서류는 쌓여 있고 의자는 비었다 ⓒ 생성형 AI 그는 올해 학교에서 손이 많이 가는 업무 중 하나를 맡았다. 우리 학교는 2년 업무순환제가 원칙이니, 원칙대로면 내년에도 같은 자리다. "원칙은 2년입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후회했다. 그는 맡은 일을 대충 넘기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그렇게 쏟다 보니 지쳤고,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 부서만, 나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다고, 조용히 덧붙였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챙기고, 남들 눈에 안 띄는 구석까지 손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원칙을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그 원칙은 한 사람을 태워 굴러가고 있었다. 성실함이 미덕이 아니라 배선도가 될 때 갈림길에서 전류는 한 길만 택하지 않는다. 모든 길로 나뉘어 흐르되, 저항이 작은 길에 더 많이 실릴 뿐이다. 조직도 원래는 그렇게 굴러가야 한다. 문제는 어느새 거의 전부가 한 길에만 실려 있다는 것이다. 학교라는 회로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저항이 적은 사람'을 먼저 찾는다. 거절할 줄 모르고, 불평 없이, 맡기면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 그렇게 성실함은 미덕이 아니라 배선도가 된다. 한 길에만 전류가 몰리면 어떻게 되는가. 전기 회로에서는 이를 '과부하'라 부른다. 전류가 많이 실린 만큼 열도 그만큼 더 난다. 저항이 낮다는 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가장 먼저 뜨거워진다는 뜻, 내버려두면 먼저 타버린다는 뜻이다. 물론 실제 화재는 접.이 헐거워진 곳처럼 저항이 커진 자리에서 나기도 한다. 다만 학교라는 회로에서 내가 본 것은 그 반대쪽이었다. 그래도 회로에는 차단기가 있다. 한계를 넘으면 스스로 끊어져 나머지를 지킨다. 학교에는 그 장치가 없다. 사람이 직접 차단기 노릇을 해야 한다. "내년에는 다른 업무 하고 싶어요"라는 말은 그가 스스로 내린 차단이었다. 그 말이 나오기까지, 그는 이미 충분히 뜨거웠을 것이다. 노자는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스스로 머문다고 했다. 그러나 물의 낮음은 스스로 택한 자리여서 덕이 되고, 회로의 낮음은 택한 적 없는 성질이어서 소모가 된다. 그가 힘든 자리를 견뎌온 이유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저항이 낮다는 성질' 때문이었다면, 그것은 개인의 희생이 아니라 조직의 게으름이다. 사슴 사냥을 말한 사람은 나였다 지난 2월, 새 학년을 준비하는 연수 기간에 교직원들 앞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루소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사슴 사냥 게임' 이야기를 꺼냈다. 사냥꾼 여럿이 사슴을 에워싸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눈앞을 지나가는 토끼를 보고 슬쩍 자리를 벗어난다. 토끼 한 마리는 잡겠지만 포위망은 뚫리고 사슴은 놓친다. 자리를 지킨 사람들만 빈손으로 남는다. 성실한 이를 바보로 만드는 것은 자리를 이탈한 우리 자신이라고,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여름이 되었다. 포위망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제 발로 교장실에 찾아와, 지쳤다고 말했다. 말은 2월에 했고, 업무분장표는 그대로였다. 토끼를 쫓지 말라고 당부한 사람이, 정작 누가 혼자 활을 겨누고 있는지는 보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토끼를 쫓은 사람이 악한 것은 아니다. 사슴을 함께 잡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을 때, 토끼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사냥꾼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의 소리 없는 희생 위에서 안전하게 돌아가는 조직이 있다면, 가장 먼저 반성해야 할 사람은 그 믿음을 만들었어야 할 사람, 판을 짠 사람이다. 사람이 끊기 전에 학교가 끊어야 한다 그래서 두 가지를 먼저 손보려 한다. 하나는 구조다. 한 자리에 몰린 업무를 쪼개 여유 있는 자리로 나누어 붙이는 일. 가는 선 하나에 몰린 전류를 여러 갈래로 돌리고, 일의 무게에 맞게 선의 굵기를 다시 재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원칙에 붙이는 단서다. 2년 순환제는 특정 자리를 독.하지 않기 위한 장치였으나, 무거운 자리까지 일률적으로 적용하면 공정하려던 원칙이 누군가에게는 두 배의 무게가 된다. 무거운 자리란 업무 희망을 받을 때마다 늘 공백으로 남는 자리다. 그런 자리는 1년으로 끊고, 다음 해에는 가벼운 자리를 배정하겠다. 사람이 스스로 차단기 노릇을 하기 전에, 학교가 먼저 차단기를 달아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둘로도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심리적 저항'이다. "나만 왜 이렇게 힘들지"라는 마음이 쌓이면, 업무량을 조정해도 그 길은 여전히 덥고 팍팍하다. 반대로 "우리가 같이 하고 있다"는 감각이 있으면, 물리적으로 힘들어도 마음은 덜 탄다. 힘든 일을 없앨 수 없다면 혼자 하게 두지 않는 것. "같이 하고 있다"는 감각은 구호가 아니라 책상을 나란히 놓는 배치에서 나온다. 그를 배웅하고 리모컨을 눌렀다. 찬 바람이 도는 짧은 순간에 생각했다. 나는 겨우 이십 분의 더위를 참았을 뿐인데 이 바람이 이토록 반갑다. 저 사람은 반년을 혼자 뜨거웠다. 원칙이 누군가의 몸을 태우고 있다면, 그것은 공정한 규율이 아니라 무심한 관성일 뿐이다. 수첩을 펼쳐 올해 교장실을 찾아온 세 사람의 이름과 그들이 맡았던 업무를 적었다. 2월엔 말로 판을 열었으니, 이번엔 업무분장표 위에 새 판을 짤 차례다. 다음 여름에는, 누구도 혼자 뜨거워지게 두지 않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다빈치게임다운로드 . 붉다. 서류는 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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