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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나비학자' '조선의 파브르'로 불리던 석주명(1908~1950). 일본인들마저 '조선인 천재 학자'로 부르며 존경해 마지않았던 인물 석주명은 어이없게도 해방된 조국, 자유대한에서 최후를 맞는다. 9·28서울수복 직후였다. 27일 오후 서울 보문동 보문사. 한양 도성 밖 이름난 비구니 도량이었던 이곳은 '탑골승방'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비구니 사찰이다. 2024년 도량 내에 '보문숲길도서관'을 개관, 지역 주민이 자주 찾는 곳이 됐다. 이곳이 한동안 그의 영혼의 집이었다. 1950년 9·28서울수복과 함께 자유를 찾은 서울 시민들 속에는 나비학자 석주명도 있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수집 나비를 지키겠노라며 피난도 외면한 채 서울 신당동에 사는 동생 석주선(1911~1996·석주선기념박물관장) 집에서 숨어 지냈다. 그 와중에도 결코 책을 놓는 법이 없었다. 석주명은 서울수복이 되자 남산 자락 예장동 국립과학박물관(옛 조선통감부 건물) 업무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 연구부장이었다. 한데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과정에서 포격으로 인해 국립과학박물관이 불탔다. 15만 마리에 달하는 한국 나비 표본, 5000여 종의 외국 나비 표본, 수천 권의 문헌도 함께 전소됐다. 충격과 비통에 빠진 석주명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그래도 자유를 찾은 기쁨으로 복구에 나섰다 매장판황금성 . 서울수복 일주일 여가 지난 10월 6일 오후 3시 무렵. 석주명은 신당동 집에서 국립과학박물관 재건회의 참석차 뛰다시피 박물관으로 향했다. 시내는 온통 잿더미였다. 그가 충무로 4가 부근 개울에 이르렀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현 남산골공원(남산골한옥마을)~중구청 부근을 지나 청계천과 합수하는 개울이었다. 동냥 거지들이 개울 다리 밑에 넘쳐났다. 비명횡사.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주검이었다. 석주명은 이날 충무로4가 현 충무로역 부근 개울에서 우익의 총에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모교 송도고보 교사 시절 나비표본을 관찰하는 석주명. 사진=성현출판사 제공 석주명은 천재학자였으나 기인에 가까웠다. 당시 언론은 편벽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한 번 책을 잡으면 누가 불러도 미동도 하지 않고 몰입하는 성격이었다. 나비 연구와 관련된 일이라면 부모가 죽었다 해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비명횡사 당일, 유유자적 걸었을 리 없다. 뛰어서 동대문운동장을 지나 충무로 4가쯤에 이르렀다. 바삐 박물관으로 가던 중 석주명의 급한 걸음에 어떤 사람이 발에 걸렸다. 그리고 상대가 시비를 걸었다. 국방색 물들인 군복 입은 청년들이었다. 빈대떡집 앞이었고 그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평양 출신인 석주명은 평양 사투리를 진하게 썼다 모바일신천지 . 평생 몸에 밴 사투리였다. 이날 시비에 평소 말투대로 답했을 것이다. "이놈 인민군 소좌다!" "아니요, 나는 나비학자 석주명이오.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오!"(영문학자 이계순 등이 목격자 등에게 취합한 증언) 곧 그들의 소총에서 불이 뿜었다. 그들은 석주명을 개천에 밀어 넣어 버렸다. 며칠 후 천신만고 끝에 가족이 찾아냈을 때 시신은 거적때기가 덮여 있었다. 빈대떡 술집 주인은 술에 취한 서북청년단 소행이라고 증언했다. 석주명은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알았을까. 유고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러나 인명(人命)은 예측할 바가 못 되어 필자는 항상 적당한 곳에서 단락을 지어 소저(小著)를 거듭한 지 벌써 백여 차이고...'(죽기 전 써 놓은 '한국산 접류의 연구' 서문 중·1973년 정식 발간) 짧은 기간 17권의 저서, 128편의 논문을 남긴 박사 학위 없는 학자 석주명은 그렇게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다시 서울 보문사. 9·28서울수복과 함께 자유 대한 동포의 손에 죽임을 당한 나비학자 석주명. 그의 시신은 동생 석주선에 의해 그 유골이 보문사에 안치됐다. 늘 평양 고향 땅에 묻히기를 희망했던 터라 동생은 그렇게 약속을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곧 되리라 믿었던 통일은 30년이 지나도 극한 대립이었다. 석주선은 1981년 보문사 유골을 남한산성 능골로 옮겨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억울하고 슬픈 죽음이었다. href="ht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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