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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사매면 호성사, 멀리 노적봉과 범련봉(닭벼슬봉)의 산능선
ⓒ 이완우
맑고 화창한 가을날, 남원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 있는 호성사(虎成寺) 법당과 칠층 석탑의 도량을 멀리 노적봉과 범련봉(梵蓮峰, 닭벼슬봉)으로 이어지는 웅장한 산능선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다. 지난 17일, 호성사의 도량 청호미술관이 개관 1주년을 맞았다. 미술관 개관을 기념하며, 이곳 호성사 주지 송하(松下) 스님이 그린 선서화 초대전이 개막하였다. 기자는 선서화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청호미술관이 있는 호성사와 그 옆의 혼불문학관을 방문하였다.
전라선 철길의 정거장이었던 구 서도역은 혼불기념관이 있는 노봉마을과 함께 최명희(1947~1998) 작가의 소설 <혼불>의 주요 무대였다. 구 서도역은 최명희 작가의 숨결과 소설 <혼불>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기자는 1970년대 중반에 철도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전라선 철도 서도역에서 철도원으로 근무하였다. 이 시절에 20대 중후반의 최명희 작가는 서도역에서 열차를 내려 삭녕 최씨의 집성촌인 노봉마을을 다녔고, 서도역 마을과 인화리 등 훗날 혼불의 무대가 될 곳을 답사하였다고 전한다.
1970년대 중반 어느 때 서도역 플랫폼이나 대합실 등 공간에서 기자와 최명희 작가는 철도원과 승객으로 몇 번은 스쳐 갔을 것이었다. 최명희 작가가 전주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혼불>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던 1980년대 초반에 기자는 작가가 졸업한 대학의 국문과에 입학하였고, 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 남원 사매면 호성사 청호미술관. 선서화 호랑이.
ⓒ 송하스님
▲ 남원 사매면 호성사 청호미술관. 호랑이 줄기 무늬 느낌의 선서화 산수도
ⓒ 송하스님
청호미술관에서 마주한 선서화 중에서 전시실 중앙에 배치된 웅장한 기세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암봉 기슭의 소나무 아래에 커다란 맹호가 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짙고 선명한 호랑이 무늬는 생명력과 기상을 의연히 품고 있었다.
이곳 호성사는 병풍처럼 두른 산능선 범련봉(닭벼슬봉) 정상 아래에 자리했던 (옛)호성암(虎成庵)을 송하 스님이 복원한 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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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호성암은 절벽 아래 바위 굴에서 수도하는 스님에게 호랑이가 처녀를 물고 왔던 기연을 계기로 처녀의 아버지가 큰 시주를 하여 산중 가람을 세웠다는 사찰 연기 설화가 전해온다.
스님의 선서화 송하맹호도는 옛 호성암과 호성사의 가람 이름과 송하 스님 법명과 함께 호랑이의 기상이 여러 산줄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더욱이 이곳 가람을 품은 산봉우리인 범련봉도 불교적 의미의 범(梵) 자를 순우리말 범(호랑이)으로 은유하면 '호랑이와 연꽃'으로도 풀이가 가능하였다.
▲ 남원 사매면 호성사 청호미술관. 선서화 산수도
ⓒ 송하스님
▲ 남원 사매면 호성사 청호미술관. 선서화 매조도
ⓒ 송하스님
산수도의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겹겹이 포개진 산등성이는 그 자체로 속세를 벗어난 무위(無爲)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붓끝으로 거칠게 툭툭 얹은 듯하면서도 자연의 깊은 숨결을 담아낸 화폭은, 스님이 오랜 수행 속에서 체득한 고요한 관조의 지혜가 화선지 위에 물결처럼 번져난 듯 깊은 여운을 담았다.
매조도는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피어난 붉은 매화 가지 위로, 참새들이 춤추듯 날아오르며 생동감 넘쳤다. 이른 봄에 피어나는 생명의 환희를 담아냈고, 수행자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해탈의 기쁨을 표현한 듯하였다.
▲ 남원 사매면 호성사 청호미술관. 선서화. 다선일여
ⓒ 송하스님
▲ 남원 사매면 호성사 청호미술관. 선서화. 다선일여
ⓒ 송하스님
넓은 장삼을 걸치고 앉아 경전을 보거나 차를 우려내는 수행자의 모습에서 일상의 소소한 평화가 묻어났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경전과 동글동글한 찻주전자, 앙증맞은 찻잔들은 책과 차를 벗 삼아 노니는 어느 선비의 한가한 한때를 연상케 하였다.
툭툭 던진 듯 간결하면서도 여백의 미를 살린 선서화는, 수행이란 멀고 험한 것이 아니라 차 한 잔 마시고 책 한 페이지 들추는 이 소박한 일상에 있다는 무언의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낮추고 세상과 만물을 온화한 눈으로 바라보는 스님의 해학 어린 시선에서 방문객은 어느덧 미소를 지었다.
▲ 남원 사매면 호성사 청호미술관. 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 한마당.ⓒ 이완우
▲ 남원 사매면 호성사 청호미술관. 연지와 태양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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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호성사와 혼불문학관(오른쪽) 일대에 혼불처럼 비추고 있다.
ⓒ 이완우
미술관 앞마당에서 개관 1주년을 자축하는 흥겨운 한마당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복을 차려입은 이들의 소리와 장구 가락, 그리고 주지 송하 스님이 어우러진 어깨춤은 가을 하늘 아래 흥겨운 축제의 장을 이끌었다. '만고강산 유람하며, 어화 벗님네야'를 부르며 우리 님을 찾아가고 있었다.
미술관 앞 잔디 마당은 우리나라 금수강산의 아름다운 명승지와 풍경을 읊으며, 유한한 인생 여정 속에서 자연을 즐기며 노니는 흥취가 가득하였다. 문득 호랑이의 당당한 기상이 가득한 이 가람에서 풍류 가락은 멋스러울 뿐만 아니라 당당한 호연지기 기상이 담기는 한마당을 열고 있었다.
청호미술관 아래의 연지(蓮池)로 걸어가 보았다. 가을빛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노적봉 범련봉의 능선 위로 눈 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연못의 마른 연잎 위로 부서지는 가을의 은은한 햇살은 마치 소설 <혼불>에서 꺼지지 않는 혼불의 불꽃처럼, 사매면의 들녘과 문학관 호성사 일대를 따스하게 감싸안았다.
▲ 남원 사매면 호성사 청호미술관과 청호저수지 사이의 송림. 태양이 청호미술관과 청호저수지 사이 송림에 은은하게 혼불처럼 비쳐들었다.
ⓒ 이완우
▲ 남원 사매면 혼불문학관 일대 청호저수지. 이 저수지는 최명희 소설 《혼불》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이며, 소설 속 청암부인의 넉넉한 덕과 진취적 기상의 혼불 정신을 상징한다.
ⓒ 이완우
청호미술관 연지를 지나서 청호저수지 사이의 우거진 송림에는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빽빽한 소나무 숲의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 드는 햇빛은 '혼불'의 따스한 온기를 품은 채 은은하게 번져가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겨 마주한 청호저수지는 소설 <혼불>의 깊은 정취를 품고 있는 혼불문학관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잔잔한 수면 위로 드리워진 풍경과 아늑한 정자는, 소설 속 청암 부인이 지닌 넉넉한 덕과 진취적인 기상의 '혼불 정신'이 오늘날까지도 그윽하게 이어져 오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 남원 사매면 혼불문학관 마당의 커다란 호석(수석). 호랑이의 자태로 혼불 정신을 상징한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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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사매면 혼불문학관 마당의 커다란 호석(수석). 호석의 뒷면, 호석 표면의 자연 호피 무늬.
ⓒ 이완우
혼불문학관 마당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호석(虎石, 수석)이 거대한 맹호가 웅크린 듯한 당당한 자태는 소설 <혼불>에 깃든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호석의 표면을 따라 자연스럽게 새겨진 신비로운 호피 무늬의 거친 문양은 묘한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호석 앞에는 간략한 설명의 글이 작은 오석에 새겨져 있었다.
虎石(호석)
이 호석(Tiger Stone)은
노봉(露峰) 마을에서 출토(出土)된 괴석(怪石)으로
호랑이 형상(形象)을 닮은 희귀한 돌(curio)이다.
혼불 정신선양(精神宣揚)을 위해서 낮에도 밤에도
최명희 혼불 문학관을 영원히 지키리라.
2006년 (丙戌) 3월 일
朔寧崔氏 郞將公派(삭녕최씨 낭장공파) 기증
이 호석은 길이 3.5m, 폭 2m, 높이 1.5m 정도의 상당한 크기였다. 이 호석은 대략 25~28톤 안팎의 무게를 지닌 육중한 호피석(虎皮石) 수석 바위라고 볼 수 있었다. 호성암의 호랑이가 소설 <혼불>의 정신적 지주인데, 혼불문학관 마당에 웅크린 호석은 '혼불'을 상징하기에 적당한 사물로 보였다.
▲ 남원 사매면 혼불문학관 마당의 커다란 호석(수석) 상부 바위틈에 맺힌 제비꽃의 가을철 꽃봉오리. 혼불문학관 담장 바위틈, 가을철에 피어난 차나무꽃
ⓒ 이완우
혼불문학관 마당과 담장 주변에는 뜻밖의 계절을 초월한 생명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호석 상부 바위틈에서는 가을철인데도 수줍게 고개를 내민 봄날의 제비꽃 초록빛 꽃봉오리가 조용히 돋아 있었고, 담장 바위틈의 차나무에서는 청초한 백색의 꽃이 피어나 문학관의 풍경에 향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혼불문학관 내부에는 최명희 작가의 생전 필기구와 친필 원고 등 진솔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작가의 숨결을 전하고 있었다. 소설 속 주요 장면을 재현한 10개의 디오라마는 방문객을 소설 <혼불>의 너른 세상으로 이끌었다.
호성사, 청호미술관과 혼불문학관을 떠나서 옛 서도역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늦가을의 태양은 범련봉 위의 하늘에서 소설 <혼불>의 불꽃처럼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 남원 사매면 혼불문학관. 소설 《혼불》의 최명희 작가 필기구와 원고 등 유품과 소설 속 10개 명장면의 디오라마가 전시되어 있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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