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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커졌다는 사실은 삶이 나아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면 빈곤과 불평등이 해소되고, 생태적 피해까지 기술혁신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프랑스 생태경제학자 티모테 파리크의 <성장이 우리를 구한다는 거짓말>(번역협동조합 옮김, 착한책가게)은 이 익숙한 약속을 심문한다. '생존과 번영의 조건을 다시 쓰는 탈성장 경제학'이라는 부제처럼, 핵심은 가난을 감수하자는 권고가 아니라 무엇을 번영이라 부를지 다시 결정하자는 요구다. 저자가 설정한 과제는 성장에 의존하는 경제의 한계를 이해하고(폐기), 성장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의 모습을 그리며(계획), 현재에서 그곳으로 이동할 길을 마련하는 것(경로)이다. 성장 비판만으로도, 좋은 사회의 청사진만으로도 부족하다. 저자가 이 세 과제를 어디까지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어디에서 더 어려운 질문을 남기는지가 이 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  '성장이 우리를 구한다는 거짓말' 표지 ⓒ 착한책가게 성장의 숫자가 놓치는 삶 논의는 국내총생산(GDP)에서 출발한다. GDP는 경제활동의 규모를 보여줄 뿐 그 사회적 의미까지 판정하지는 않는다. 화폐로 거래되지 않는 돌봄과 관계, 여가의 가치는 충분히 포착하지 못하는 반면, 환경 훼손이나 사회적 손실에 대응하는 지출은 경제활동으로 기록한다. 경제 규모를 재던 지표가 사회가 추구해야 할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었다는 익숙한 비판이다. 이것은 통계지표를 다른 숫자로 교체하자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성장경제에서는 소비자의 소득, 기업의 이윤, 정부의 GDP 극대화가 서로를 밀어 올린다. 기업은 소비를 자극하고, 소비자는 생활을 시장에 의존하며, 커진 기업은 정책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저자가 설명하는 성장의 회로는 탐욕스러운 개인을 탓하는 도덕론보다 구조론에 입각한다. 각자의 합리성 추구가 사회 전체에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강제하도록 조직된다. 따라서 얼마나 생산했는가에 앞서 무엇을 위해 생산했는가, 누가 혜택을 얻고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생을 마감하면서 GDP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는 문장처럼, 경제의 성적표와 삶의 성적표는 같지 않다.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면 충분한가 책이 겨냥하는 또 하나의 믿음은 기술 발전으로 경제성장과 환경 훼손의 연결을 끊을 수 있다는 녹색성장과 탈동조화(decoupling)의 약속이다. 파리크는 단위 생산물에 필요한 자원을 줄이는 것과 경제 전체가 사용하는 자원의 총량을 줄이는 것은 다르다고 지적한다. 효율 개선으로 절약한 비용이 추가 소비와 생산으로 돌아가면 개별 기술의 성과가 전체 규모의 증가에 잠식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찬반이 아니라, 기술의 성과를 어느 규모와 시간 안에서 평가하느냐이다. 실제로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2022년 보고서에서 최소 18개국이 10년 넘게 생산기준 온실가스와 소비기준 이산화탄소 배출 감소를 지속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아무런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논쟁을 정리해서는 곤란하다. 다만 이러한 성과가 세계적 규모에서 필요한 감축과 사용 자원 저감을 충분히 빠르게 달성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질문이다. 그가 제시하는 탈성장은 성장 의존 체제에서 성장률이 추락하는 경기침체와 다르다. 생태적으로 과도한 생산과 소비를 계획적으로 줄이면서 삶의 질과 사회적 평등을 지키도록 경제를 재편하는 과정이다. 무엇을 줄이고 늘릴지, 줄어드는 노동을 어떻게 나누고 필수 서비스를 어떻게 보장할지 민주적으로 결정하며, 성장 없이도 번영하는 포스트 성장 사회를 지향한다. 이때 모든 국가와 계층에 같은 감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탈성장을 생태한계를 넘어선 국가들에 해당하고 필요한 전환으로 설명한다. 과잉 소비 사회의 축소와 기본적 필요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활조건 개선은 구별해야 한다. 정책의 목록에서 기업의 존재 이유까지 파리크의 대안은 개인에게 절약을 권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맺음말에는 노동시간 단축, 기본소득, 고용 보장, 금융거래세, 특정 형태의 광고 금지, 에너지 배급제, 탄소 회계 등 연구를 통해 파악한 380가지 정책수단이 언급되며, 전환마을, 생태마을, 협동조합, 지역화폐 같은 실험도 소개된다. 서로 다른 이 제안들은 생산과 분배, 노동과 의사결정의 규칙을 다시 설계하려는 다양한 시도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기업의 존재 이유를 묻는 부분이다. 저자는 기업마다 명확한 생산 사명을 규정하고, 그 활동이 사회의 필요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설명하는 경제를 상상한다. 여러 이해관계자가 사명 설정에 참여하고 내부 사명위원회와 외부 심사로 실제 활동을 확인한다. 이윤 규모뿐 아니라 기업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를 중심에 놓아 기업의 정당성을 재구성하자는 제안이다. 이것은 온건한 기업윤리와 다르다. 저자는 탈성장이 출발부터 반자본주의적이라고 명시한다. 자본 축적 체제를 유지한 채 성장의 강박만 제거할 수는 없으므로, 임금노동, 상품과 시장,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이윤 추구 기업의 사회적 중요성을 줄이고 이들이 주변적인 위치에 놓이는 포스트 자본주의로 이동하자고 주장한다. 동시에 소유 형태만 바꾼다고 생태적 한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며, 무한한 물질적 팽창을 추구한다면 비자본주의 체제 역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선명함이 책의 힘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독자가 요구할 설명의 수준이 높아진다. 기업과 시장의 사회적 비중을 줄인 뒤 생산과 투자를 어떻게 조정하고 공공서비스의 재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정책수단의 풍부함과 체제 전환의 가능성은 서로 관련되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르네 파세와 만나는 세계관, '탈성장'이라는 이름의 긴장 파리크의 문제의식은 <경제와 생명(L'Économique et le Vivant)>을 쓴 르네 파세의 생태경제학적 세계관과 만난다. 파세에게 경제는 인간사회의 하위체계이고, 인간사회는 다시 생물권의 하위체계다. 경제가 자신을 지탱하는 자연의 재생산 조건을 훼손하면서 영구히 번영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다. 다만 생태적 한계를 경제에 우선하는 조건으로 인정하는 것과, 그 조건을 충족할 유일한 길이 자본주의 폐기라고 결론짓는 것은 다른 단계의 논증이다. '탈성장'이라는 이름에도 비슷한 긴장이 있다. 이 말은 모든 발전을 멈추고 가난을 나누자는 주장으로 오해되기 쉽지만, 돌봄과 교육의 질, 공동체 관계, 건강한 환경과 여가의 확대까지 중단하자는 뜻은 아니다. 저자가 동의할지 모르지만, 대중에게 설명할 때 "성장의 방식과 목적을 전면적으로 개혁하자"고 표현하면 뜻이 더 잘 전달될 것이다. 실제로 탈성장 운동 플랫폼인 degrowth.info는 이 명칭의 도발성이 논쟁을 촉발하고 기존 성장체제에 쉽게 흡수되지 않게 하는 장.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저자가 성장을 지지하면서 의제의 주목도를 높이려고 이름만 바꿨다고 해석하면 본문과 충돌한다. 파리크는 물질적 생산·소비의 축소와 성장 의존의 해체를 요구한다. 이 급진성을 지워버리면 소개가 아니라 다른 주장으로의 대체가 된다. 따라서 비평의 질문은 이렇게 제기하는 편이 정확하다. 탐욕과 낭비, 비용의 외부화를 억제하고 공유와 공생, 사회적 효율과 상생을 중심에 놓는 자본주의의 전면적 개혁으로도 그가 원하는 삶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사적 소유와 시장을 일부 유지하되 이윤 추구에 생태적 상한과 사회적 의무를 부과하는 경제는 반드시 실패하는가. 이것은 파리크의 주장을 부드럽게 풀어쓴 것이 아니라 그의 반자본주의 결론에 정면으로 맞서는 질문이다. 물론 이 질문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자본주의 개혁론 역시 '착한 자본주의'라는 구호를 넘어 시장과 사적 소유를 유지하면서도 자원 사용 총량을 줄이고 분배를 개선할 수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  자본주의를 넘어서 다른 성장 경로가 가능할까. ⓒ 픽사베이 ISO/UNDP 53001은 다른 길의 단서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과 연결해 검토할 만한 최근 시도가 ISO(국제표준화기구)와 유엔개발계획(UNDP)이 2026년 9월 28일 발표한 국제표준 ISO/UNDP 53001:2026이다.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조직의 전략과 거버넌스, 일상 운영에 통합하는 경영시스템 요구사항으로, 조직의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파악하고 이해관계자를 참여시키며 목표와 데이터로 성과를 평가·개선하도록 한다.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선언에서 운영과 검토의 문제로 옮기려는 접근이다. 파리크가 기업의 사명을 사회적 필요와 연결하고 이행을 심사하자고 제안한다면 이러한 국제규범과 대화할 접。은 있다. 체제를 먼저 폐기해야만 책임 있는 기업이 가능한가, 아니면 기업이 검토받는 방식을 바꾸어 투자와 생산의 방향을 전환하고 소유와 권력의 재구성으로 이어지는 길도 가능한가. 국제표준과 공적 규제, 시민 감시를 연결하는 작업은 그러한 가능성을 시험하는 경로다. 온건하고 느린 경로다. 표준 채택이 생태적 한계 안의 활동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개별 조직의 개선이 세계경제 전체의 물질적 사용 규모를 실제로 줄이는지, 부정적 영향을 공급망 외부로 옮기지 않는지 따져야 하며, 경영표준을 자원 배분과 재분배를 강제하는 정치권력과 동일시할 수도 없다. 유엔 SDGs 자체도 탈성장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목표 8은 경제성장을 명시하며 세부목표 8.1은 최빈개도국에 연 7% 이상의 GDP 성장을, 8.4는 자원 효율 개선과 탈동조화를 추구한다. 결국 성장 지속과 생태적 한계 준수를 함께 추구하는 이 틀이 어디까지 작동하고 어느 지.에서 더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는지가 논쟁의 핵심이다. 맺음말이 끌어오는 '지구 한계 안에서 모두를 위한 복지'(human well-being for all within planetary boundaries, IPCC 2022년 제3실무그룹 보고서 '정책결정자를 위한 요약' 중)도 같은 주의를 요구한다. 좋은 삶과 안녕을 포괄하는 이 목표에 동의한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폐기해야 한다는 결론까지 합의한 것은 아니다. 공통의 목적과 체제 선택은 구분되어야 한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Leave No One Behind)'가 유엔 SDGs의 핵심원칙이란 사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말도 안 되는 얘기이지만, 엄연하고 진지한 구호로 통용된다. 세계정부 없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 가장 어려운 질문은 결국 세계적 전환의 정치다. 경제는 국경을 가로질러 연결되어 있는데 조세와 복지, 노동과 산업정책의 책임은 주로 국민국가에 묶여 있다. 한 나라가 생산과 소비를 줄일 때 다른 나라의 생산 확대, 투자 이동, 무역관계와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유엔과 여러 국제기구, 협약과 표준 등 국제 거버넌스가 존재하지만 유엔 또한 스스로를 세계정부와 구별한다. 문제는 협력의 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합의 이행과 재분배를 뒷받침할 권한이 얼마나 충분하고 민주적으로 조직되어 있느냐이다. 이 조건에서 자본주의 폐기 선언은 방향을 가리킬 수 있어도 경로를 대신할 수는 없다. 전환 과정에서 성장 의존적인 연금과 고용, 국가재정은 어떻게 지탱할 것인가. 축소 부문 종사자의 생활은 누가 보장하며, 역사적으로 더 많이 소비한 사회와 기본적 기반시설이 필요한 사회의 몫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조정이 준비되지 않은 축소는 저자가 반대하는 경기침체나 긴축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파리크 역시 맺음말에서 경제를 단번에 바꾸는 마법의 버튼은 없으며 생산과 소비뿐 아니라 사회 조직 방식을 재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어판에 추가된 세르주 라투슈에 대한 반론에서도 시장과 가격, 화폐, 기업 통제, 공공서비스 재원을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같은 탈성장 진영 내부의 구호와 모호함까지 비판하며 구체성을 요구한 。은 이 책의 미덕이지만, 그 엄격한 잣대는 파리크 자신의 체제 전환 구상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현실을 냉정하게 본다면, 이런 규모의 전환은 재앙적 위기가 기존 질서의 정당성을 흔들어 혁명적 재편이나 지구적 대타협을 강제한 뒤에야 가능하다는 전망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질 수 있다. 시민 저항과 대안적 실험이 축적되어 어느 순간 성장의 강제 혹은 강박을 넘어선다는 구상은 훨씬 아름답지만 더 많은 정치적 설명을 요구하는 꿈이다. 그렇다고 재앙이 해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위기는 연대 대신 배제와 강압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될 수도 있고, 바닥에 도달했을 때 회복할 여지가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필요한 것은 재앙 이후의 혁명을 기다리는 태도보다 재앙 이전에 변화의 권한과 비용, 책임을 조직하는 정치일 수밖에 없다. <성장이 우리를 구한다는 거짓말>의 가치는 그 정치가 지향해야 할 목적을 집요하게 묻는 데 있다. 그러나 성장 신화에서 깨어나는 일과 성장 이후의 사회를 운영하는 일 사이에는 여전히 큰 간격이 남는다. 공유와 공생을 확장하는 개혁은 자본주의를 살리는 수선인가, 그것을 넘어서는 전환인가. 국제규범과 지구 차원의 민주적 통제와 효율적 거버넌스의 축적은 세계정부 없는 세계에서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성장이 우리를 자동으로 구하지 못하듯 아름다운 대안도 저절로 실현되지 않는다. 책을 덮고 남는 질문은 단순히 '탈성장은 옳은가'가 아니다. 우리는 재앙을 기다리지 않고도 경제의 목적과 규칙을 함께 바꿀 수 있는가. 탈성장이 또 하나의 믿음에 머물지 않으려면, 이상적인 목적지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제도와 규칙을 바꿀 구체적인 이행의 정치를 모색하고 입증해야 한다. 역사적 경험은 아름다운 꿈이 가능했던 이유가 그 아름다움 때문이라기보다, 그것이 단지 '꿈'이었기 때문일 때가 훨씬 많았음을 전한다. 안치용 ESG연구소장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모바일 카카오야마토 . 파세와 만나는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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