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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코끼리들이 웃는다’를 이끄는 연출가 이진엽은 관객 참여와 커뮤니티, 장소 특정성을 특징으로 하는 작업을 해왔다. 지난 7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대표작 ‘물질’로 현지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호응을 받은 그가 오는 17~18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신작 ‘찰나의 찰나’를 선보인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연대와 회복탄력성을 성찰하게 하는 독창적인 작품.”
지난 7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공연된 이진엽 연출가의 대표작 ‘물질’에 쏟아진 현지 전문 매체들의 찬사다. “물질할 때 매일 죽으러 들어갔다 살아서 나온다”던 제주 해녀 인터뷰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수조 안에서 턱밑까지 차오른 물과 사투하는 몸짓을 통해 고된 노동의 무게와 소외된 이들의 생존을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어린아이부터 백발노인까지 전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세계 무대에서 연대의 힘을 확인한 그가 이번에는 모래로 매개체를 바꿔 신작으로 국내 관객을 찾는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협력 예술가인 그는 신작 ‘찰나의 찰나’를 10월 17~18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선보인다. 덴마크 시각예술가 헬레 호브와 의기투합한 이번 신작은 배우와 관객이 빗자루를 쥐고 모래 위에 궤적을 빚어내는 작업이다. 흩어지고 사라지는 모래의 물성을 무대 언어로 끌어올려 찰나의 감각을 직조한다. 최근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마주한 이 연출가로부터 관객 참여와 커뮤니티, 장소 특정성에 천착해 온 그의 치열한 예술 세계를 들어봤다.
영국 유학 시절 졸업작품으로 장소 특정형 공연 첫 시도
지난 7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선보인 이진엽의 대표작 ‘물질’은 거대한 수조 안에서 턱밑까지 차오른 물과 사투하는 몸짓을 통해 고된 노동의 무게와 소외된 이들의 생존을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아비뇽 페스티벌
“호브가 모래로 표현하던 삶의 유한성, 즉 ‘플리팅 모먼트(Fleeting Moment)’를 우리말로 고민하다 ‘찰나’를 떠올렸습니다. 모래 그림은 쉼 없이 지워지고 사라집니다. 정해진 답을 좇기보다 사라지는 궤적 속에서 잡념을 비우고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길 바랐어요.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나 원초적 창의성을 되찾는 놀이이자 명상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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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미술을 전공한 그는 영국 유학 시절 관객이 교내 건물들을 이동하며 관람하는 현대 오페라를 졸업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는 “당시엔 그게 장소 특정형 공연이라는 것도 몰랐다. 다만 거리의 시선을 느끼며 일상을 무대로 삼는 작업이 재밌었다. 그래서 무대 디자인 대신 이런 공연을 직접 만들어보자고 마음먹었다”고 회고했다.
2009년 청계천 주민 만나며 극단 코끼리들이 웃는다 창단
지난 7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선보인 이진엽의 대표작 ‘물질’ 은 거대한 수조 안에서 턱밑까지 차오른 물과 사투하는 몸짓을 통해 고된 노동의 무게와 소외된 이들의 생존을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아비뇽 페스티벌
그가 극단 ‘코끼리들이웃는다’를 창단하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펼친 것은 2009년부터다. 공연 소품을 제작하러 청계천을 찾았다가 한 60대 상인으로부터 평생 공연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들은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그는 “공연장을 찾지 않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무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청계천 일대를 리서치한 뒤, 그곳 상인과 노동자들을 직접 참여시켜 전시와 공연으로 확장한 ‘동네 박물관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후 그의 무대는 삶의 터전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자신의 집을 개방한 ‘201호, 아인슈타인이 있다’, 창덕궁 후원을 거니는 ‘창덕궁 새로보기 - 후원몽’, 어둠 속 신체를 감각하는 ‘몸의 윤리’를 비롯해 재개발 지역 주민들의 애환을 담은 ‘안녕, 광명’, 구로공단 미싱사들의 삶을 조명한 ‘독산, 여러분’, 시각장애인과의 시간 감각 차이를 실험한 24시간 공연 ‘3시에서 3시, 4시에서 4시’, 노인들의 성을 솔직하게 풀어낸 ‘잠자리 연대기’, 각자의 장례식을 상상한 ‘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 등 장소와 커뮤니티를 가로지르는 문제작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작업을 시작하다 보니 사회적 이슈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청계천 주민들을 만나며 재개발이나 복지 사각지대 같은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게 된 것처럼요. 제 공연은 텍스트 중심이 아니라 관객이 무엇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공유하느냐가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관객 참여는 제 작업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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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커뮤니티, 관객참여가 특징인 이진엽의 작품세계
이진엽 연출 ‘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 ©LG아트센터
그의 무대에서 장소와 커뮤니티, 그리고 관객 참여는 불가분의 관계다. 청계천 상인과 독산동 공단 미싱사, 시각장애인, 65세 이상 노인에 이르기까지 이 연출가는 언제나 극장 밖 사람들의 삶을 무대 안으로 불러들였다. 전문 배우가 아닌 일반인, 소외된 이들의 삶을 끄집어내는 비결은 뜻밖에도 ‘듣기 위한 기다림’에 있다. 청계천 시절엔 골목을 쓸고 야외에서 연습하며 주민들이 먼저 말을 건네길 기다렸고, ‘잠자리 연대기’에서는 “그때 잠자리는 하셨어요?”라는 집요하면서도 단도직입적인 질문으로 어르신들의 깊은 속내를 끌어냈다.
이번 신작 ‘찰나의 찰나’는 표면적으로는 명상적 놀이에 가깝지만, 무대 뒤편에는 여전히 그가 천착해온 커뮤니티의 온기가 살아 숨 쉰다. 미등록 이주민 신분으로 밤샘 노동을 이어가면서도 연극을 향한 열망을 놓지 않는 남미 출신 청년이 배우로 함께 무대에 서며, ‘잠자리 연대기’에 참여했던 노인 등 이전 작업으로 인연을 맺은 커뮤니티 구성원 8명이 진행자로 참여해 공연을 받친다. 작품 전면에 사회적 이슈를 내세우진 않지만, 소외된 이들에게 창작의 기회를 나누고 함께 호흡하는 ‘과정으로서의 연대’를 구현한 셈이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라는 대형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 또한 파격적이다. 1,200석이 넘는 기존 객석을 완전히 비워둔 채, 무대 위에 211석 규모의 4면 객석을 별도로 세워 관객 전원을 무대 위로 불러올린다. 극장 활용의 효율성 측면에서는 이례적인 선택이지만, 이 연출가에게는 타협할 수 없는 예술적 선언이다.
이진엽이 관객에게 건네고 싶은 본질은 ‘연결감’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선보일 이진엽 연출의 ‘찰나의 찰나’의 공연 이미지. ©)Kristine Zipfel
“대극장에 가면 티켓 가격에 따라 좌석 등급이 나뉘잖아요. 마치 비행기 일등석을 부러워하듯 다른 관객을 바라보게 되는 그 차별적인 구조를 제 공연에서만큼은 없애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가격으로 동등하게 무대에 서는 거죠. 관객이 텅 빈 거대한 객석을 등지고 무대로 올라오는 순간, 단순한 ‘보는 사람’에서 ‘행위하는 주체’로 전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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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빈 객석 자체가 관객에게 거대한 상징적 울림을 줍니다.”
무대에 오른 관객 중 30~50명에게는 빗자루가 주어지고, 나머지 관객은 손가락으로 모래를 만지며 무대를 함께 채운다. 뉴질랜드 출신 시노그래퍼 샘 트리브리지와 협업해 구현한 공중 ‘모래 낙하 시스템’은 바닥에 머물던 평면적 모래 그림을 수직적이고 입체적인 시각 경험으로 확장한다.
이처럼 타인과 몸을 부대끼고 감각을 나누는 그의 무대에서는 유독 눈물을 터뜨리는 관객이 많다. 슬픈 서사가 있는 극이 아님에도, 전작 ‘차차차’나 ‘마주하고 마주하니’는 물론 아비뇽에서 선보인 ‘물질’에서도 관객들은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으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이에 대해 이 연출가는 “내가 관객에게 건네고 싶은 본질은 ‘연결감’”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7월 아비뇽에서 각광받은 뒤 해외에서 투어 요청 쇄도
이진엽 연출 ‘커뮤니티 대소동’ ©국립극단
“일상에서는 낯선 타인을 만나면 경계하고 벽을 쌓기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공연이라는 안전한 시공간에 들어서면 타인을 향한 경계가 무장해제됩니다. 제 작품에서 관객들이 서로 눈을 맞추고 손을 잡으며 무언가를 함께 짓는 그 ‘연결의 감각’이 너무 낯설거나 그리워 울컥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겐 그 연결감이 부담스럽고 불편할지라도, 그 과정을 통과해 서로를 기다리고 바라보게 되는 변화야말로 제가 무대에서 실험하고 싶은 지.입니다.”
아비뇽 축제 이후 2~3년간의 글로벌 투어 일정이 잇따라 잡히는 등 해외 무대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는 벌써 또 다른 신작을 구상하고 있다. 소설가와 협업해 시각을 완전히 차단한 암흑 속에서 청각과 언어, 촉각으로 관객의 상상력을 폭발시키는 작품이다.
거리에서 극장으로, 청계천 골목에서 아비뇽과 국립극장으로 무대는 넓어졌지만, 이진엽이 서 있는 자리는 여전히 한결같다. 극장의 벽을 허물고 소외된 이의 손을 잡으며, 관객과 예술가가 오롯이 감각으로 마주하는 그 찰나의 순간이다.
극단 ‘코끼리들이 웃는다’를 이끄는 연출가 이진엽은 관객 참여와 커뮤니티, 장소 특정성을 특징으로 하는 작업을 해왔다. 지난 7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대표작 ‘물질’로 현지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호응을 받은 그가 오는 17~18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신작 ‘찰나의 찰나’를 선보인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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