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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1월 발행된 ‘조광’ 창간호 표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년의 한동웅(한흑구의 장남). /한동웅 제공 1945년 봄날에 한흑구는 장남 동웅을 소학교(초등학교)에 넣었다. 1942년 ‘조광’에 수필 ‘농촌 춘상’을 발표하고는 아예 펜을 놓아버렸다. 지면에 이름을 내면 그만큼 친일문학의 대세에 합류하라는 일제의 강요와 회유가 드세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척추로 형성된 신념과 맹세를 지키는 방법의 하나가 절필이라고,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1945년 상반기를 버텨나가는 한흑구의 모습은 그의 글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말에서든 글에서든 자기 자랑도 남의 허물도 다 멀리하는 성품이어서 친일의 펜을 잡지 않았던 자긍심에 대한 언급도, 친일의 펜을 잡고 말았던 지인들에 대한 비판도 일절 한마디 남기지 않은 한흑구는 1945년 상반기를 어떻게 견뎌내고 있었을까? 그때 소학교에 다닌 장남 한동웅의 기억을 바탕으로 어렴풋이 그려볼 수는 있겠다. ‘원로에게 듣는 포항근현대사2’(연오랑 2022) 표지. /경북매일 DB 한동웅은 1938년 3월에 태어났다. 원적이 평양부(시) 하수구리 96번지로, 한흑구가 살았던 생가 주소 그대로이다. 아마도 한흑구는 아내의 출산이 임박한 시기에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 ‘성대장’을 나와서 산후 조리를 헤아리며 두세 달포 동안은 평양 본가에 머물렀을 것이다. 2026년 현재 여든여덟 살 한동웅은 고려대를 나와 포항에서 영어 교사와 교장으로 교직에 몸을 담았다. ‘월남 1.5세대’로서 평안남도 도민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것은 평양에 탯줄을 묻고 원적을 올리고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 산골에서 1945년 10월까지 성장한 삶의 이력이 맡겨준 직책이었다. 그의 연곡리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원로에게 듣는 포항근현대사 2’(연오랑, 2022)에 잘 기록돼 있다. 이 책에 나온, 한동웅의 제자인 작가 김도형이 가지런히 정돈해둔 그의 회고담―아버지와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와 자신의 기억―에서 군데군데 발췌하면 ‘1945년 상반기 성대장의 한흑구’의 삶을 흐릿한 실루엣으로 그려낼 수 있다. 거의 매일 습관처럼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닭울음 소리를 들었던 한흑구의 ‘성대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음은 한동웅의 기억에서 불려 나온 것이다. <“집은 ㄴ자 기와집이었어. 황금성오락실게임 봄이 되면 울타리에 핀 노란 개나리꽃이 아름다웠지. 닭 둥지에 닭이 수시로 알을 낳았고, 밤에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겁나서 문밖에 나가지도 못했어. 여름이 되면 식구들이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강냉이를 삶아 먹었지.”> 한동웅은 아버지가 당국의 허가 없이 소나무를 베어내고 2천여 평 되는 땅에 과수원을 조성했다며 그래서 일어났던 한바탕 소동도 들려준다. <“일본은 정책적으로 밀주와 벌목을 엄격하게 단속했거든. 그런데 아버지가 많은 소나무를 베어냈으니 오죽했겠어? 일본인 면장이 깜짝 놀라 평양시장한테 상황 보고를 했지. 평양시장은 골치 아픈 사람이 갔으니 그냥 내버려두고 동태만 살피라고 했다더군.”> 한흑구는 닭울음 소리에 예민했는데, 어린 장남이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 소리는 따로 있었다. 거의 여든 해가 지난 뒤에도 늙은이의 기억에 고스란히 고여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것은 언제든 현실의 소리로 되살아 나온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 마츠다(松田)라는 교장이 있었는데, 칼을 차고 교단에 올라와 훈시했어. 마츠다 교장은 거의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이거나 재끼(노름)를 했지. 아버지를 감시하고 회유하기 위해서였지. 마츠다 교장은 말을 타고 우리집에 왔는데, 말발굽 소리와 철커덕거리는 사브로(sabre, 軍刀) 소리가 지금도 생생해. 나는 마츠다 교장이 나타나면 집 옆에 있는 언덕바지로 도망갔어.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고 모기도 성가셨지만 마츠다 교장이 더 무서웠거든.”>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나무위키 1945년 8월15일 해방의 환희. /네이버 블로그 미군정청 통역관 한흑구(오른쪽에서 두번째). /한동웅 제공 1945년 8월15일, 한흑구는 새벽에 닭 울음을 들었으나 별 감상 없이 아침상을 물리기 바쁘게 혼자서 마을 뒷산에 올라가 고독하게 한나절을 보냈다. 어느덧 꿈만 같아진 미국 유학, 그 고학과 방랑의 추억을 훠이훠이 거닐었다. 태평양전쟁이 편지마저 막아버린 스웨덴의 루스 알바, 지구 어느 구석에 살든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기로 했던 작별의 약속을 떠올려보았다. 1933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뉴욕 유니온역에서 헤어진 뒤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나 유럽 어디선가 세계적 음악가로 성장하고 있을 안익태, ‘코리아 판타지’를 지휘하는 그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바다이야기게임다운 . 언제 다시 글을 써보나. 펜 대신 낫과 삽을 잡은 손바닥의 굳은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새삼 확신도 해보았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까지 투하했으니 아무리 악독한 일본 군국주의라 해도 머잖아 백기를 들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분명히 한흑구는 1945년 8월15일 새벽의 ‘닭 울음’으로 해방을 예감하지는 못했다. 그에게 해방은 뻘뻘 땀 흘리는 자전거로 달려왔다. 1946년 ‘예술조선’에 실리고 1976년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는 수필 ‘닭 울음’에서 그는 이렇게 밝혀둔다. <이날 오후가 되어서, 평양에서 친구가 땀을 흘리면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 왜왕의 항복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오! 하느님!” 나는 감격하였다. 울었다.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나왔다. 사십 년 동안 나의 몸속에 서리었던 붉은 피가 심장으로 한꺼번에 용솟음쳐 모여드는 것을 감각하였다.> ‘사십 년 동안’이라 했어도 그날 한흑구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일제가 완전한 식민지배의 막을 올리기 직전에 태어났으니 그야말로 생애 최초로, 서른여섯 해 만에 처음으로 마침내 일제의 하늘이 아니라 조국의 하늘 아래에 서 있었다. 한흑구는 가족을 성대장에 남겨두고 곧장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제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만나고 고당 조만식도 만나야 했다. 그는 발걸음이 가볍고 기뻤다. 단 한 조각도, 단 한 편(片)도 친일문장을 쓰지 않았으니 양심에 꿀릴 것이 없는 몸이었다. 그날로부터 스무 해쯤 더 흐른 다음, 한흑구는 그저 조용히 우리 민족의 ‘영광된 작가’라는 꽃다발 없는 꽃다발을 받게 된다. 필생의 대업으로 삼아 일제강。기 친일문학의 전모를 철저히 조사·연구·집대성한 문학평론가 임종국, 심지어 자기 부친의 친일행적까지 샅샅이 뒤져놓은 그가 1966년 펴낸 『친일문학론』에다 “끝까지 지조를 지켜 단 한 편의 친일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들”을 밝혀둔다. 해방을 못 보고 타계한 문학인으로는 윤동주와 이육사가 있고, 해방을 맞이한 문학인으로는 변영로, 오상순, 한흑구, 이희승, 김영랑 등을 비롯해 당시로는 신인과 다름없었던 청록파의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이다. 1945년 8월15일 직후, 눈 깜짝하는 사이에 소련군과 김일성 세력이 평양을 장악해 버렸다 모바일 바다이야기 온라인 . 조만식은 후배들에게 하루빨리 38선을 넘어 탈출하라고 종용한다. 8월 하순, 한흑구는 신변 위험을 감지했다. 연곡리 ‘성대장’에 가족을 두고 먼저 혼자서 남쪽으로 내달려야 했다. 조만식이 그에게 서울 가는 트럭을 주선해준다. 역사의 참담하고 해괴한 변고였다. 그러나 일생을 통틀어 글로 남긴 한흑구의 그날에 대한 회고는 아주 짧았다. 고통의 응어리, 그 자체 같았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자, 9월1일 나는 제일 먼저 고향을 뒤로 두고 서울로 뛰어올라왔다. 적도(赤都)의 평양은 내가 살 곳이 못 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11월에 우리의 온 가족이 삼팔선을 넘어서 무사히 상경하는 데 성공을 하였다.> 적도(赤都), ‘붉은 도시’ 평양은 살 곳이 못 돼서 망명도생(亡命圖生)의 발길로 후다닥 단걸음에 38선을 넘어선 한흑구. 1945년 9월9일 출범하는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청). 이제는 ‘경성’이란 지명도 폐기된다. 한양, 한성, 경성을 거쳐 ‘서울’이 탄생했다. 한자(漢字) 표기에는 무관심해졌다. SEOUL, 수도란 뜻의 순우리말 ‘서울’은 그냥 ‘SEOUL의 서울’로 거듭났다. 한흑구는 미군정청 서울시장 통역관이 된다. 미주대륙에서 고학과 방랑으로 보냈던 청춘의 다섯 해가 졸지에 ‘서울 정착’ 밑천으로 돌변한 것이다. 살림집으로는 경성제대 미술과 주임교수가 살았던, 필동의 근사한 적산가옥을 배정받는다. 아직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던 1945년 11월, 그는 미군 트럭으로 개성 송악산 언저리 38선을 넘어온 가족을 마중한다. “아버지와 소련군이 보였어. 아버지가 ‘떠라비쉬’(동무) 하니까 통과시켜 주더군. 우리 식구는 미군이 운전하는 쓰리쿼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어.” 장남의 증언이다. 남산 밑 적산가옥에는 미처 떠나지 못한 일본인 노부부가 기거하고 있었다. 부엌 옆 온돌방의 노부부는 나라가 패망하여 죄인처럼 숨어 지내며 안전한 귀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처지이고, 한흑구 가족은 해방된 나라가 이념과 냉전의 칼날에 두 동강 나서 고향 탈출에 성공하여 그들의 오랜 둥지를 빼앗은 처지였다. 일본인 노부부는 무사히 일본 가는 뱃길에 오른다. 한흑구의 손길이 닿은 일이다. 어린 장남은 어느 날 갑자기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짠하게 바라본다. 영영 지워지지 않는 그것이 한동웅의 기억에 남은, 패망한 일제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대환 작가 내가 살 곳이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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