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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을 마친 페르 귄트가 솔베이그의 무릎에 지친 머리를 누일 것 같은,
클레멘타인이 고향 바닷가에 돌아와 아비의 무덤을 어루만질 것 같은,
이노크 아든이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옛사랑의 창가를 서성일 것 같은,
로봇 데이빗이 어린 날 하루를 허락받아 엄마의 손을 잡고 잠들 것 같은,
하루하루 떨어져 휘발하는 가을.
―가을날은, 수많은 지나간 가을날들을 한데 겹쳐 살도록 하기에 유별난 것이지.
테이블 위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신문지 반쪽만큼 들어와 있다. 책을 펼쳐 든 상대방은 말이 없다. 고양이가 몸을 길게 펴면서 하품을 한다. 고양이처럼 태만해도 괜찮은 가을 오후.
―가을엔 회상이 많아지지. 이유가 뭘까?
진화생물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라고 상대방이 대꾸한다. 활동을 줄이고 웅크리게 되기 전에 머릿속을 한번 정리하는 게 생존에 유리하거든. 그래서 과거의 자료들을 불러오게 되는 거지.
그래? 그럴싸한데.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을 파고드는 추억들은 이 겨울이나 내년의 생존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출처. pixabay
서양 음악 구조의 기본은 3부 형식이다. 약간 과감하게 말하면, 소나타나 론도 형식 등도 3부 형식의 확장형이다. 처음에 나왔던 것은, 되돌아온다. 그런 3부 구조는 묘하게 회상의 정서와 연결된다.
아련한 서주가 붙어 있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영국 민요를 관현악으로 편곡한 본 윌리엄스의 ‘푸른 옷소매 환상곡’도 그렇다.
기억은 종종 왜곡된다. 수동적으로 왜곡될 뿐 아니라 능동적인 왜곡이 개입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유년의 기억은, 많은 경우 실제 남루하고 초라했을지라도,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하고도 아늑한 이상향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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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우리와 친숙해진 정지용의 <향수>(1927)는 보석 같은 토착어의 향연이 실개천 모래에 잔잔히 박힌 사금처럼 펼쳐지는 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잇달려 가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 고이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이슬 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물결 어률리듯
밤물결에 흔들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이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서름 밤에,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조상의 피가 저 북쪽 벌판에 닿아 있어서일까. 이런 토속적 전원의 서정이 담뿍 우러나는 시를 읽을 때 머릿속에는 보로딘 교향곡 2번의 3악장 호른 솔로가 떠오르곤 한다. 초원 지대 음유시인의 가락을 인용한 부분이다.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이에게 때로 과거는 오욕이 된다. 일제의 군국주의가 극단으로 치닫던 1939년 윤동주는 시 <자화상>에서 이렇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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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출처. pixabay
회상과 추억을 달콤한 시어로 형상화한 주인공으로 기욤 아폴리네르를 빼놓을 수 없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르네/ 꼭 기억해야만 할까/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찾아왔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날들은 흘러가고 나는 남아있네”라는 ‘미라보 다리’는 세계 청춘들이 애송해 온 명편으로 꼽힌다.
까까머리 청소년 시절 내 가슴에 쿵, 하고 내려앉은 짧은 시는 그의 <이별(L’Adieu)> 이다.
나는 히스 가지를 꺾었다
기억해 주오 가을은 죽었다는 걸
우리는 이 땅에서 다시 만나지 못하리니
시간의 향기, 히스 꽃 가지
기억해 주오 나 그대를 기다림을
늘 바로 그 사랑이 문제다. 하인리히 하이네에게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슈만은 그의 시집 <서정적 간주곡(Lyrisches Intermezzo)>에서 열여섯 편을 뽑아 사랑의 시작에서 그 청산까지를 하나의 줄거리로 엮었다. 가곡집 ‘시인의 사랑’이다. 열 번째 곡 ‘그 노래를 들으면’은 이렇다.
내 연인이 불렀던
그 노래가 울려 나오는 걸 들으면
거친 고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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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이 터져버리려 한다.
그러면 내 어두운 동경이
저 숲의 언덕 위로 나를 몰아
너무도 큰 내 아픔은
거기서 눈물로 쏟아진다.
사랑과 이별의 회상을 노래한 시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악 중 하나가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 3악장 아다지오다. 이 악장의 주선율들이 전해주는 회상과 애수의 감정을 미국 가수 에릭 카먼은 1976년 팝송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에 담았다.
그 교향곡을 들을 때면 늘 한 쌍처럼 떠오르는 다른 작품이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정신적 사부인 차이콥스키의 관현악 모음곡 3번 첫 악장이다. ‘비가(Élégie)’라는 제목이 있다. 이 곡은 차이콥스키가 51회 생일인 1891년 5월 7일 뉴욕 카네기홀 개관 페스티벌에서 직접 지휘해 격찬을 받았다.
[차이콥스키 관현악 모음곡 3번 1악장 ‘비가’ (42:42부터 감상)]
―기억이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짓게도 만들지만 그토록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라면,
이라고 내가 말한다.
다른 삶에서는 기억 같은 건 없어도 되지 않을까?
아냐, 너는 너라는 존재의 정체가 지금 네가 갖고 있는 정신의 활동, 즉 ‘의식’이라고 생각하지?
틀렸어, 너를 만드는 건 기억이야.
그가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한다.
너라는 자아의 기억을 삭제한 의식은 네가 아냐. 그건 네가 깊은 잠에 드는 순간 사라져. 잠에서 깨면 네 기억을 안고 새로운 의식이 켜져. 의식에는 연속성이 없어. 기억을 불러내서 새로 만들어질 뿐이야.
아픈 기억도 서운한 기억도 네 일부야― 너는 바로 네가 가진 기억이야.
햇볕이 성큼 더 방 안으로 들어온다. 고양이가 가뿐히 몸을 일으키더니 그쪽으로 몸을 옮긴다.
―창밖의 나뭇잎이 지난주보다 붉어졌군.
출처. pixabay
유윤종 음악평론가·클래식 칼럼니스트
국 가수 에릭 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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