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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여름이 물러나고 조석으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가을의 문턱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건 곧 다가올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대비한 훈훈한 정신적 영양제가 아닐까?
9월 27일 일요일, 늦여름의 열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파리의 오후. 파리 대표 클래식 공연장 필하모니 드 파리(Philharmonie de Paris)에서 아주 특별한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건물 외부에서부터 감지되었던 흥분은 공연장까지 이어졌고,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평소와는 다른 들뜬 분위기가 감돌았다. 세대와 국적, 배경도 서로 다른 관객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가운데 막판 표 구하기에 성공한 사람들까지 합류해 객석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오로지 한마음으로 기다려온 만남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필하모니 대공연장 2,400석은 오랜 클래식 애호가부터 젊은 팬, 그리고 그녀를 오랫동안 추종해 온 열성 팬들로 빼곡하게 들어찼고, 객석은 일찌감치 뜨겁게 달아올랐다.
10년 넘게 음악적 파트너로 함께해온 피아니스트 이도 바르샤이(Iddo Bar-Shai), 그리고 지난 7월 베르비에 페스티벌에서 슈만의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으로 함께했던 체코 출신 메조소프라노 막달레나 코제나(Magdalena Kožená)가 아르헤리치의 파리 무대에 합류했다. 브르노(Brno) 태생인 코제나는 야나체크에서는 바르샤이와, 슈만에서는 아르헤리치와 호흡을 맞췄다. 서로 다른 개성과 활동을 펼쳐온 세 아티스트는 교감과 경청으로 파리 관객들에게 행복한 순간을 선사했다.
필하모니 드 파리 / 사진. Ⓒ W. Beaucardet, 2016
연주는 호흡, 음악적 만남은 회춘
왕성한 행보를 이어가는 피아노 여제
상세 리뷰에 앞서 이날의 주인공 아르헤리치의 최근 무대 이력을 살펴보았는데, 85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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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Verbier Festival)을 시작으로 빈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 Wien), 그라페네크(Grafenegg), 버밍엄, 런던 로열 알버트 홀(Royal Albert Hall), 그리고 이번 필하모니 드 파리에 이르기까지 세계 주요 무대를 누비고 있는 건반 여제의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왕성하다. 연주는 호흡이고, 새로운 음악적 만남은 회춘인 아르헤리치에게 무대는 곧 뜨겁게 끓는 삶의 현장과도 같다.
솔로 피아니스트로서만 활동한다고 해도 최고의 예우를 받을 만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관심은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솔리스트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이 바로 아르헤리치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나 실내악 무대를 위주로 활동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이번 파리 무대 역시 우정과 교감이 중심 키워드가 된 훈훈한 만남이었다.
지난 9월 27일 필하모니 드 파리에서 열린 아르헤리치, 바르샤이, 코제나 합동 공연 / 사진. Ⓒ 박마린
드뷔시와 라벨 그리고 야나체크
객석에 울려 퍼진 치명적 마법
클로드 드뷔시의 <백과 흑으로(En blanc et noir)>는 두 대의 피아노가 때로는 서로 긴밀하게 얽히고 때로는 날카롭게 대립하는 독특한 음향 세계가 특징으로, 매우 어두운 현실을 배경으로 탄생한 곡이다. 작품이 작곡된 1915년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병마와 싸우던 드뷔시의 건강 또한 극도로 악화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느리고 어두운 제2악장은 당시의 시대적 불안과 작곡가가 처한 개인적인 상황을 강렬하게 반영하는데, 전사한 친구 자크 샤를로(Jacques Charlot)를 추모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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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악장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에게 헌정되었다.
드디어 백발의 노장이 피아니스트 이도 바르샤이를 대동하고 무대에 들어섰다. 그 순간 환호와 함께 열광 섞인 휘파람 소리가 객석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객석은 마치 팝스타의 콘서트 현장을 방불케 했다.
단순히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화려한 작품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전쟁과 죽음, 불안과 아이러니가 교차하는 작품인 만큼 아르헤리치와 바르샤이의 연주는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둔 듯 화려함 이면의 암울함을 드러냈다. 두 대의 스타인웨이 그랜드 앞에 나란히 앉은 두 피아니스트는 바로 옆자리에서 서로의 호흡을 생생하게 느끼며 교감했다. 때로는 상대의 선율을 뒤쫓아 가듯 응수하던 두 아티스트의 손에서 수많은 음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르헤리치가 건반을 날카롭게 할퀴는 듯한 특유의 터치에서 순식간에 감미로운 터치로 전환하자, 스타인웨이에서 관능적이고 눈부신 울림이 흘러나왔다. 거침없이 음색과 음향을 자유자재로 조율하며 두 피아니스트가 만들어낸 사운드는 치명적인 마법처럼 객석에 울려 퍼졌다.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이도 바르샤이 / 사진. Ⓒ 박마린
야나체크의 <모라비아 민요 모음곡>은 순식간에 무대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무대에는 두 대의 스타인웨이 중 한 대만 남았다. 그리고 바르샤이가 막달레나 코제나와 함께 등장하는 순간, 코제나의 검은 드레스는 조명을 받아 반짝였고 객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야나체크의 작품은 체코 출신인 코제나의 정체성이 담긴 각별한 레퍼토리인 만큼, 그녀는 야나체크가 민요에서 포착했던 억양과 악센트, 말하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선율을 모국어로 섬세하게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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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조소프라노 코제나의 목소리는 필하모니의 풍성한 음향을 타고 자연스럽게 객석으로 뻗어나갔고, 바르샤이의 피아노는 성악이 묻히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그 안으로 깊숙이 몰입했다.
인터미션 현장 또한 볼만했다. 필하모니의 로비는 1부 순서에 대한 갖가지 의견을 나누는 관객들로 그 어느 때보다 왁자한 분위기를 이루었다. 관객층이 다양한 만큼 저마다 공연장에 오게 된 계기나 배경도 천차만별이라는 。 역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한몫했다.
2,400석 대형 연주홀에서 벌어진 ‘살롱 음악회’
다시 등장한 마르타와 이도, 이번에는 한 대의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았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네 손을 위한 <어미 거위(Ma mère l’Oye) 모음곡>은 가족과 어린이 관객을 의식한 것일까? 동화와 마법, 어린 시절의 이미지가 소리로 하나씩 펼쳐졌다. 오른편에 앉은 아르헤리치는 높은 음역에서 특유의 민첩하고 유연한 움직임을 자랑했고, 바르샤이는 자연스러운 탄력으로 응대했다. 두 사람의 연주는 2,400석 규모의 대형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공연이라기보다 마치 살롱에 모인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하우스콘서트처럼 느껴졌다. 가벼운 미소와 시선, 작은 몸짓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오랜 교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지막 곡인 <요정의 정원(Le Jardin féerique)>에서 색채가 서서히 확장되며 찬란한 빛처럼 뻗어나가자 객석에서는 환호가 이어졌다.
살롱 음악회 분위기는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론도 A장조(Rondo en la majeur, D.951)>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이 작품은 슈베르트가 생애 마지막 해인 1828년에 작곡한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에서는 삶의 마지막 시기의 비극적 어둠보다는 따뜻한 서정성과 풍부한 낭만성이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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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자리를 바꿔 바르샤이가 고음역을 맡았다. 피아노의 뚜껑은 완전히 제거된 상태였는데, 이는 오히려 음향 공간이 한층 확대된 듯한 효과를 만들어냈다. 자세히 귀 기울여 들으니 두 음악가가 서로 다른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 같았다. 한쪽이 먼저 말을 걸면 다른 한쪽이 귀 기울이면서 답하고…. 서로의 숨결과 기분을 살피는 듯한 섬세하고 친밀한 대화는 객석을 훈훈하게 덥혔다.
공연을 마치고 관객에게 인사하는 이도 바르샤이와 마르타 아르헤리치 / 사진. Ⓒ 박마린
<시인의 사랑>에 담긴 플로레스탄과 에우제비우스
<시인의 사랑>은 슈만이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시에 곡을 붙여 1840년에 완성한 연가곡으로, 모두 16개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슈만에게 1840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다. 오랫동안 사랑해온 클라라 비크(Clara Wieck)와 마침내 결혼한 해이기 때문이다. 하이네의 시에는 사랑의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대한 기대와 황홀, 불안과 질투, 실망과 이별, 기억과 체념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슈만은 이러한 복잡한 감정을 짧고 응축된 노래 속에 담아냈다.
특히 <시인의 사랑>에서 피아노의 역할은 중요하다. 성악가가 텍스트 전달을 멈춘 뒤에도 피아노는 계속해서 음악을 이어간다. 전주와 간주, 그리고 노래가 끝난 뒤의 후주가 시의 의미를 보완하고 확장하면서, 때로는 성악가가 미처 말로 다 하지 못한 내면의 감정까지 드러낸다. 성악가와 피아니스트가 각각 독립적인 음악적 주체로서 하나의 내면적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번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는데, 그 순서가 되자 아르헤리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코제나에게 디바의 자리를 기꺼이 양보하는 배려를 보였다. 두 사람은 지난 7월 베르비에에서 이미 이 작품을 함께 연주한 바 있어, 이번 무대는 그 만남에 또 다른 깊이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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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전달하는 코제나를 위해 아르헤리치는 피아노를 통해 노래가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막달레나 코제나 / 사진. Ⓒ 박마린
슈만의 피아노 악보를 접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슈만에게 피아노라는 악기는 목소리와 같은 표현의 매개체였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슈만에게 늘 경도되어 있다’고 말하는 아르헤리치. 감미로운 선율을 끌어내다가도 불현듯 섬광처럼 번뜩이는 열정으로 청중을 뒤흔들어버리는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 슈만의 내면과 상상 속의 자아인 플로레스탄(Florestan)과 에우제비우스(Eusebius)를 모조리 흡수하여 내면화한 듯하다. 그녀의 터치는 감미로운 속삭임에서 격렬한 불꽃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슈만의 두 자아가 지닌 상반된 정서를 교차시켰다. 충동과 내면, 열정과 고요, 환상과 고백이 번갈아 모습을 드러내며 음악은 변화무쌍하게 펼쳐졌다.
두 아티스트가 서로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듯한 순간은 잔잔한 감동을 남겼다. 마치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듯 은밀한 친밀감이 이어졌고, 객석은 이를 숨죽여 경청했다.
성악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아르헤리치의 피아노 반주로 노래하는 것을 꿈꾸어 보았으리라. 그녀의 존재감은 심지어 피아니시모에서도 뚜렷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앞세우기보다는 파트너를 배려하고 존중한다. 이 .이 바로 아르헤리치의 특별함이다. 최고의 위치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언제나 그 빛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며 함께 나눈다는 .이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도 바르샤이, 막달레나 코제나 / 사진. Ⓒ 박마린
샴페인처럼 톡 쏘는 환희와 객석을 들뜨게 한 생생한 에너지, 그것은 아르헤리치가 만들어낸 마법 그 자체였다. 객석에서는 기립박수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피아노의 전설을 향한 찬탄을 비롯하여 순수한 행복감이 가득했다. 85세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보여준 놀라울 만큼 담담하고 겸손한 모습은 자유로운 예술가로서의 교훈이자, 어쩌면 삶에 대한 아름다운 교훈이기도 하다.
파리=박마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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