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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하고 이만큼 살았으면 오래 산 거 같아. 돌아보니 애 낳고, 키우고, 돈 벌고, 집을 늘리고, 그렇게 습관처럼 한 남자랑 사십 년 넘게 살았네. 세상에나, 사십 년이라니. 언제 이렇게 세월이 허락도 없이 착착착 흘러가버린 걸까? 난 이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명우는 아내가 이런 생각을 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야?"
아내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그냥 당신과 상관없이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삶을 살고 싶어. 내 일생일대 가장 큰 용기를 낸 거니까 그렇게 하게 해줘."
아내는 중학교 교사였고, 정년퇴직하면서 약간의 우울증을 겪었고, 자궁에 제법 큰 물혹이 있어 제거하기도 했다. 아내는 교외에 마당이 딸린 작은 집을 얻었고, 골든리트리버라는 제법 큰 개도 키웠다. 집안으로 들이지는 않았지만 고정적으로 마당에 오는 고양이 몇 마리에게 밥도 주고 그 고양이들에게 이름도 지어주었다고 했다. 남편이 아닌 친구로는 가끔 와도 좋다고 허락 아닌 허락을 했다.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저녁노을을 보는 아내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삽화는 생성형 AI로 제작한 가상 이미지입니다.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저녁노을을 보는 아내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보였다. 가족이 굴레였나.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아내의 뜻을 따랐던 건, 그때 노을 속으로 스며들던, 한없이 평화로워보이던 표정에서 언뜻 결혼 전의 아내 모습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침은 늘 달걀프라이와 씨리얼을 넣은 우유, 사과 한 개면 되었다. 씨리얼 대신 고구마나 감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했다. .심이나 저녁은 집에서 먹는 날이 많지 않았다. 명우는 술을 한 잔 마시고 들어왔을 때, 일부러 양말을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고 수건을 쓰고 바르게 펴서 걸어놓지 않았다. 다음날 그런 흔적을 볼 때 명우는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저녁에 서재에 앉아 음악을 크게 틀고 눈을 감을 때, 가끔 아내의 얼굴에 드러나던 숨길 수 없던 생기가 떠올랐다. 그런 자유가 필요했던 거라고, 얽매이지 않았다면 훨씬 더 자유로웠을 감정이나 느낌들. 켜켜이 쌓인 일상에 가려버렸던 얼굴이었다. 명우가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아내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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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가즈미와 꼭 닮은 작은 체구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삽화는 생성형 AI로 제작한 가상 이미지입니다.
일본도 낮에는 전철 안이 한가했다. 책을 읽다가 문득 가즈미가 무슨 말을 할 때면 에, 하며 아주 잠깐 뜸을 들이다가 수줍은 듯 말을 꺼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맥락 없이 떠오른 거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었고, 마주보이는 자리에 앉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인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거기 드라마의 한 장면을 재현해 놓듯 가즈미와 꼭 닮은 여인이 무언가 골똘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체구도 작았고, 천으로 된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은 모양도 가즈미 같았다.
설마 가즈미?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 가즈미인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 여인에게 눈길이 갔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닥친 일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도쿄의 전철 안에서 가즈미를 마주 보고 앉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명우의 가슴이 무섭게 뛰었다. 바라볼수록 가즈미가 맞는듯했다. 하지만 이십 년 세월이 명우를 주춤하게 했다.
애써 책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다시 고개가 들렸다. 그리고 홀린 듯 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거기, 이십 년 전의 가즈미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명우 또래의 가즈미를 닮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이십 년을 훌쩍 뛰어넘은 예전의 가즈미가 거기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손이 떨렸다. 망설임은 시간을 무디게 했다. 가즈미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가즈미를 만나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녀가 내리기라도 한다면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조바심이 났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 여인에게 다가갔다.
"もしかしてがづみさんじゃないですか?"
모시카시테 가즈미산자 나이데스카?
혹시 가즈미가 아닌지 묻는 명우의 목소리는 예의 바르고 부드러웠지만 떨림을 감출 수는 없었다. 여인이 고개를 들어 명우를 바라보았다.
"人違いじゃないでしょうか。"
히토치가이자 나이데쇼오카.
여인은 명우의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모르는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정중하게 대답했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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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을 하는 목소리까지 비슷한데 가즈미가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가즈미가 아니라니.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오갈 수 없는 꽉 막힌 공간 안에 갇힌 듯했다. 명우는 정말 가즈미가 아니냐고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여인은 이미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실례를 범할까봐 그럴 수 없었다. 전철 안은 조용했고, 빠르게 달리며 내는 바퀴의 진동만이 명우의 귀를 가득 채웠다. 도착역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고, 곧 전철이 멈췄다.
"失礼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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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했다고 사과하고 자리로 돌아와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걸어오는 몇 걸음이 길게만 느껴졌다. 명우가 자리에 앉으려 할 때 문이 열렸고 그 여인이 내렸다. 명우는 총총히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쫓았다. 가즈미였다면 모른 척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다. 무슨 연유가 있어 모른 척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여인은 가즈미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명우는 。。 더 또렷하게 그 여인이 꼭 가즈미일 것만 같았다. 더 붙들고 얘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자꾸만 후회되었다.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라고, 세상에 닮은 사람은 많고, 더구나 외국 사람은 분별이 더 어려우니까 하고 위안을 하려 해도 여인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일흔의 여인이 쉰 살의 가즈미로 보인다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명우를 바라볼 때, 분명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고 느껴졌다. 목소리도 명우가 알던 그 목소리 같았다. 가즈미가 나이 들었다면 꼭 저런 모습일 거였다. 그런데 아니라고 했다.
"눈앞에 보이는 길가의 작은 주.에 들어갔고, 빠르게 술에 취했다." /삽화는 생성형 AI로 제작한 가상 이미지입니다.
내릴 정거장을 한 정거장 지나쳐서야 서둘러 내렸다. 다시 걸어가는 동안 다리 힘이 풀려 어디든 주저앉고 싶었다. 눈앞에 보이는 길가의 작은 주。에 들어갔고, 빠르게 술에 취했다. 무거운 걸음을 끌고 와 침대에 누웠다가, 버릇처럼 텔레비전을 켰다. 한 추레한 남자가 바닷가에서 울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남자는 눈물콧물이 범벅이 돼 여자 이름을 부르더니 끝내 차가운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가 그렇게 바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명우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단순히 가즈미를 닮을 사람을 봤을 뿐인데 단순히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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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명우의 일상이 소리 없이 균열을 내며 갈라졌다. 잘, 그러니까 가즈미를 떠올리지 않은 많은 날을 잘 지내왔다고 믿었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가즈미를 닮을 사람을 봤을 뿐인데 작은 틈 사이로 용암이 흘러나오듯 뜨겁고 맹렬하게 가즈미가 보고 싶었다.
도쿄에서 일 년여를 보내는 동안에 가끔 가즈미를 떠올리긴 했다. 다시 일본에 오면서 자연스럽게 이십 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고, 거기 가즈미가 있었다. 연락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이러저러 바쁜 일이 많았다는 것은 핑계였다. 숙제처럼 문득문득 가즈미가 생각났다. 어둑해진 학교 교정을 걸을 때, 늦은 밤 인적이 끊긴 거리의 조도 낮은 가로등 밑을 걸어 숙소로 돌아올 때, 주머니를 더듬으며 오래전 끊었던 담배를 찾는 손길처럼 가즈미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가즈미도 아니고 닮은 사람을 봤다고 이렇게 흔들릴 수 있다니. 명우는 이런 자신이 낯설었는데 전철에서 마주 보던 그 여인만 생각하면 앞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배반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명우는 숨을 멈췄다. 휴대전화 너머 거기, 가즈미가 있었다." /삽화는 생성형 AI로 제작한 가상 이미지입니다.
"명우상?"
명우는 숨을 멈췄다. 휴대전화 너머 거기, 가즈미가 있었다. 처음엔 환청인 줄 알았다. 며칠 동안 가즈미에 묶여 있었으니 환청이 들릴 만도 했다. 명우는 잠시 침묵했다. 교정을 빠져나오는 중이었고,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을 타고, 젖는 삼나무 냄새가 실려 왔다.
"가즈미에요."
그때에야 명우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렀다. 그 소리가 너무 커 가즈미에게도 들릴 것만 같았다. 이십 년 동안 연락이라고는 매년 가즈미가 신년에 보낸 연하장이 전부였는데 느닷없이 전철에서 그녀와 닮은 사람을 보더니, 이번에는 진짜 가즈미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어떻게…"
"에, 설마, 반갑지 않은 건 아니죠?"
가즈미의 웃음 섞인 농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요. 갑자기 연락이 닿아 당황해서 그만."
"이렇게 연락하면 닿을 수 있었는데요, 그렇죠?"
국제전화라고 생각할까봐 서둘러 도쿄에 있다고 말했다.
"에, 그럼, 한번 볼까요?"
"네, 그럼요, 봐야죠."
시간이 지나면 전화가 끊기기라도 할까봐 서둘러 대답했다.
양진채 작가
/양진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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