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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정승조 아나운서 ■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수박밭.
물 한 모금 없이 온종일 이어지는 고된 노동 속에서 한 사람이 주머니 속 작은 메모지를 꺼냅니다.
그리고 루브르에서 보았던 한 。의 명화를 떠올리며, 이 고통을 나만의 승리로 뒤집어보자고 다짐하지요.
오경훈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태어납니다.
동업자에게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던 순간, 그는 거창한 계산 없이 살기 위해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복귀작의 이름은 '불안의 대가'.
한때 스스로를 '희망을 그리는 작가'라 불렀을 만큼, 그에게 그림은 무너진 삶에서 붙든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그의 화면을 채운 분홍빛, 불길 속을 내달리는 토끼와 족제비, 그리고 우리 모두가 별에서 왔다는 우주의 이야기까지.
밝고 경쾌한 그림 너머에는 삶의 짙은 그늘을 딛고 일어선 한 사람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정승조의 아트홀릭'이 '오경훈 작가'와의 대화를 전합니다.
■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기까지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처음 붓을 들게 된 순간이 기억나시나요?
불안의대가 2022 the price of anxiety 130cm X 97cm acrylic on canvas
저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고상한 예술과는 거리가 먼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학창 시절에도 학급에 꼭 한 명씩 있는, 까불거리며 밖에서 뛰어놀기 좋아하는 아이였죠. 굳이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면 레고 블록을 즐겨 만들었던 기억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짝사랑하던 친구가 미술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친구와 말 한마디라도 더 나눠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부모님께 떼를 썼습니다. 그게 제가 그림이라는 행위를 시작하게 된 첫 계기였습니다.
그곳에서 제 삶의 유일한 스승이라고 부르는 학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대단한 테크닉을 배운 건 아니었지만, 그분은 제게 "너 정말 그림 잘 그린다"라며 진심 어린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늘 학교에서 뒤처지고 꾸중만 듣던 아이였기에, 내가 무언가 잘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이 났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학원을 계속 다니게 하려는 선생님의 전략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칭찬은 저를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깊이 집착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말마다 혼자 학원에 나와 그림을 그릴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다시 작품 활동과 먼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음 한구석에는 늘 '언젠가 내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지만, 막상 작가의 길로 선뜻 발을 내딛기는 어려웠습니다.
30대 초반까지 작가의 어시스턴트, 디자인 회사 근무, 프리랜서 작업 등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에서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다 인테리어 디자인 분야로 일을 확장하며 동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동업자의 횡령으로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는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삶의 굴곡이라지만 당사자로서 절망감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희망이 모두 사라졌다고 느꼈던 그 순간, 저는 살기 위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작가가 되어야겠다거나 거창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계산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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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무너진 현실에서 벗어나 내 안의 답답함을 발산하고 희망을 찾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렇게 2021년 스케치를 시작해 2022년 완성한 저의 첫 복귀작이 바로 '불안의 대가(THE PRICE OF ANXIETY)'입니다.
흔히 예술가들이 이야기하는 '치유'나 '희망'이라는 단어를 진부하게 느끼기도 했지만, 당시의 저에게는 정말 살기 위한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최근까지는 저 자신을 '희망을 그리는 작가'라고 소개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 더 깊어지고 달라진 것 같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예술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얽히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죠. 요즘 작업을 하다 보면 저 스스로도 '내가 결국 사람과 사람, 삶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이전에는 살기 위한 절박한 희망을 담았다면, 현재는 삶과 예술,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깊은 질문을 던지며 저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아직 저를 한 단어로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예술가라는 삶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지난여름 'Against the Flow' 개인전을 마치셨지요. 전시를 하나 끝내고 났을 때, 이번 전시는 작가님께 어떤 시간으로 남았나요?
peaceful sunday 2025 130cm X 97cm acrylic on canvas
'Against the Flow'라는 타이틀처럼, 저는 그동안 삶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지 않고 무언가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참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삶에서 순리를 역행한다는 건 피곤하고 힘든 일이죠.
늘 불안과 긴장 속에서 살아가던 저는, 지난여름 이 전시를 준비하며 "이제는 마음을 비워내는 연습을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작품을 다루고 삶을 대해보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전시장 전경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공간 안에는 무언가에 치열하게 투쟁하는 듯한 모습의 도상과, 삶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듯한 편안한 느낌의 도상이 서로 교차하고 공존하도록 연출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던 삶과 비워내는 삶의 경계가 한 공간 속에서 조화를 이루길 바란 것이죠.
전시를 막 끝냈을 때 일적으로는 "아휴, 이틀만 쉬자"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웃음), 작가로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이제 좀 마음이 편해졌니?"였습니다. 그리고 전시가 끝난 후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면서 신기하게도 마음이 .。 더 편안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번 전시는 제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깊이 새기게 해준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불평과 불안이 참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늘 "나는 진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왜 안 될까?", "왜 인정받지 못할까?"라는 결핍감 속에 살아왔죠. 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돌아보니 '어라, 내가 그림을 그리면 누군가가 나를 찾아주고, 나는 지금 온종일 그림을 그리고 있잖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미 제가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루고 살아가는 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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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삶의 흐름을 거스르며 치열하게 사느라 지쳐 있을 관객분들에게도 이 공간이 잠시 불안의 무게를 내려놓고, "나 역시 이미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의 평온과 위안을 얻어가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더 깨달은 。이 있다면, 저는 예술이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내 생각을 표현하며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내면의 투쟁을 넘어, 저 스스로와 관객 모두에게 삶과 작업을 새로운 관.으로 바라보게 해준 뜻깊은 전환。으로 남아 있습니다.
■ 새로운 작업은 대개 어디에서 시작되나요. 작업을 하다 문득 '이건 그려야겠다' 싶었던,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이 있었다면 들려주세요.
viva la ddu ddu ddi va 2024 336X194cm acrylic on canvas
다른 작가분들도 비슷하겠지만, 모든 이야기는 삶의 희로애락 안에서 시작됩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 때문에, 일상에서 보고 듣고 겪는 수많은 것들 속에서 이야기와 도상을 건져 올립니다. 그래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항상 작은 메모지를 들고 다니거나 휴대전화에 간단한 스케치와 메모를 남겨두곤 합니다.
"이건 꼭 그려야겠다" 싶었던 가장 강렬한 순간을 꼽자면,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마주했을 때였습니다. 거대한 캔버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와 환희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제 몸에 전율처럼 느껴졌습니다. 밴드 콜드플레이의 앨범 커버로도 익숙했던 그림이었지만, 실물의 아우라는 압도적이었죠. 그 자리에서 '언젠가 나만의 방식으로 이 그림을 재해석해 보겠다'는 다짐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짐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결정적인 순간은 '8월의 수박밭'에서 찾아왔습니다. 생계를 위해 인력사무소에 나갔던 날이었습니다. 일당이 세다는 소장의 말에 무작정 따라간 곳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수박밭이었습니다. 물 한 모금 제대로 주지 않는 악덕 사장 밑에서 온종일 고된 노동을 했죠. 저를 제외하면 모두 외국인 노동자분들이었는데, 찌는 듯한 더위와 지친 노동 속에 사람들의 신경은 곤두서고 곳곳에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어를 잘하던 동료들이 갑자기 말을 못 하는 척하며 제게 다가와 "사장한테 물 좀 달라고 해달라", "쉬는 시간 좀 달라고 해달라"며 부탁을 건네더군요.
제 고향 광주의 '무등산 수박'이 떠오르며, 저는 먹어보지도 못한 귀한 수박의 가치와 내가 처한 가혹한 노동의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 깊은 좌절감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그 몸이 부서질 듯 힘들고 짜증이 치밀던 순간, 문득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쳤습니다. "이 고통과 분노를 나만의 승리로 뒤집어보자." 그리고 주머니 속 작은 메모지에 루브르의 그 명화를 떠올리며 초안 스케치를 끄적였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비바 라 뚜뚜 띠바(viva la ttu ttu tti va)'입니다.
훗날 이 스케치를 캔버스에 옮길 때는 당시의 지옥 같던 기억을 유쾌하고 위트 있게 보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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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아래 구석의 심술궂은 작은 개구리는 물과 휴식조차 주지 않던 악덕 사장을, 발길질하는 토끼와 발에 채여 날아가고 있는 토끼는 무더위와 노동에 지쳐 좌절하고 투닥거리던 동료들을, 화면 중앙의 소녀는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선 기상과 투지를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힘들었던 기억도 결국엔 웃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인물들을 귀엽고 경쾌하게 풀어냈습니다. 관객에게 무겁게 다가가기보다는 삶을 가볍고 즐겁게 마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삶은 무겁기보단 가볍고 즐겁게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끔찍하게 덥고 짜증 나던 순간에도 "좋은 생각을 하자, 멋진 꿈을 꾸자, 운명에 굴하지 말자"며 붓을 들었던 기억. 희로애락 중 '노(怒)'의 감정을 가장 밝고 유쾌한 에너지로 승화시켰던 그 수박밭의 순간이 제게는 가장 잊을 수 없는 시작。이었습니다.
■ 화면에는 유독 분홍빛이 자주 감돕니다. 왜 분홍일까요. 이 색으로 자꾸 돌아오게 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One of the necessary conditions is a perfect lie to live a good life
분홍은 삼원색에 들어가지 않는, 어떻게 보면 아주 애매하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강렬하고 예쁜 색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의 색이기도 하지만, 붉은 자줏빛으로 깊어지면 '피'와 '상처'의 색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저는 평소 어떤 상황이든 '스테레오 타입'으로 해석하려는 버릇이 있습니다. 한쪽 면만 보는 게 아니라 입체적으로 그 이면까지 다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주위에 지나치게 밝은 사람을 보면 '저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숨어 있을까' 하고 굳이 양면성을 되짚어보는 식이죠. 그렇기에 이 예쁘고 강렬하면서도 애매한 '분홍'은 저에게 세상의 이면을 담아내기에 더없이 흥미로운 매개체였습니다.
이러한 제 시선이 드러났던 순간이 오래전 회사원 시절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10월의 어느 날 퇴근길, 여의도 마천루 사이로 해가 저물며 딱 10분 남짓 눈부신 노을이 차오르는 '골든아워'를 마주했습니다. 차가운 빌딩 유리벽에 반사되는 기막히게 예쁜 분홍빛 노을을 보며 문득 '저 화려한 마천루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땀, 그리고 애환이 담겨 있을까?' 하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아름다운 분홍빛 속에서 삶의 짙은 그늘을 본 것이죠.
당시는 붓을 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그 순간 느꼈던 강렬한 감정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 사진이라는 매체를 선택했고, 그 작업들을 모아 2015년에 'pink city ghost - seoul'이라는 개인 사진전까지 열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보였던 다소 을씨년스럽고 서늘한 기운의 작품들을 돌아보면, 제가 분홍빛 너머의 이면을 얼마나 깊게 파고들었는지 잘 느껴지곤 합니다.
세상의 양면과 애환을 입체적으로 다 들여다보던 그 시간을 지나, 지금은 이 분홍빛을 조금 더 단순하고 순수한 '모노 타입'으로 바라보기 위한 연습을 해나가는 중입니다. 물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스럽고 따뜻한 분홍빛으로 말이죠. 그 애매함과 강렬함, 그리고 매체를 넘나들게 만드는 유연함이야말로 제가 자꾸만 분홍이라는 색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 색을 한 번에 칠하지 않고, 얇게 덧바르기를 수없이 반복하신다지요. 이 느리고 더딘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으실 텐데요.
작업 중인 오경훈 작가
가장 솔직한 이유는 제가 원하는 특유의 질감과 화면의 밀도가 오직 이 과정을 통해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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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평소 제임스 진, 오드리 가와사키, 캐시미르 같은 현대 미술가들의 영향을 아주 깊게 받았습니다. 사실 단순히 느낌만 반영하는 수준을 넘어, 그들의 스타일과 만화적인 도상들을 적극적으로 가져와 제 화면의 바탕으로 삼고 있죠.
하지만 그렇게 가져온 만화적이고 선명한 도상들 위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수채화 특유의 투명한 물성'과 '안개 속에 싸여 있는 듯한 아련한 분위기'를 함께 살려내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수채화 기법만으로는 제가 원하는 완성도와 단단한 밀도를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아크릴 물감을 아주 얇게 조율해 겹겹이 덧바르는 느린 레이어링 방식을 고수하게 되었습니다. 아크릴의 단단한 밀폐감을 유지하면서도, 수없이 쌓인 레이어를 통해 투명하고 몽환적인 감각을 함께 얻어내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요소를 가져와 제 작업으로 승화시키는 동시에, 제가 원하는 분위기와 표현법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도 계속해서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중입니다.
■ 요즘 화면에는 토끼와 족제비가 뛰어다닙니다. 이 친구들은 어떤 존재인가요?
최근 조카가 생기면서 삼촌이 되었습니다. 사실 원래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피붙이라 그런지 느낌이 전혀 다르더군요. 참 예쁘고 귀여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귀여운 아이가 앞으로 연옥 같은 세상 속에서 어떤 일들을 겪으며 살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화면 속으로 제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동물들을 불러왔습니다. 야생 토끼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족제비는 북한산이나 동네 산을 오르다 가끔 마주치곤 했는데 참 경쾌하고 귀엽더군요. 이 생명체들에 내 조카의 모습을 투영해 스케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제 그림 속 토끼와 족제비는 단순히 앙증맞은 모습에 그치지 않습니다. 연옥을 상징하는 불길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어디론가 쉼 없이 달려 나가는 역동적인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결국 삶이란 끊임없이 어디론가 나아가는 여정이기에, 그 가혹한 세상 속에서도 당차게 길을 개척해 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 우주에 마음을 두고 계시다지요. 그 광활한 세계의 무엇이 작가님을 끌어당기나요. 그림을 그리는 마음과도 닿아 있을까요?
Blue Solstice, Pink Equinox 2026 가변크기 Acrylic on wood
시작은 몇 년 전 유튜브 알고리즘 때문이었습니다. 우연히 칼 세이건, 닐 디그래스 타이슨 같은 천문학자들의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이분들은 단순한 과학자를 넘어 시인이자 철학자처럼 느껴지더군요.
특히 닐 디그래스 타이슨이 했던 말이 저를 강렬하게 사로잡았습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탄소, 질소, 산소 같은 원자들은 모두 과거 별들이 사멸하고 폭발하며 은하계로 배출한 물질에서 왔으며,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우주가 있고 우리는 모두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밤하늘을 볼 때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별의 원자가 숨 쉬고 있기에 스스로가 거대하게 느껴진다는 그 말이 너무나 멋졌습니다.
저는 과학에 대해 깊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시적인 과학적 사실에 설득되고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별'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구'라는 로켓에 타고 함께 이동하는 아주 작은 별들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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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우주적 시선은 저에게 깊은 위안을 줍니다. 아득히 광활한 우주의 관。에서 바라보면, 제가 평소 지고 있던 삶의 무게나 일상의 조바심 역시 한낱 작은 조각일 뿐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제 그림에는 직접적인 우주 풍경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사실 지구와 우주라는 구분도 인간이 만들어낸 분류일 뿐, 우리가 시선을 두는 모든 곳이 결국 우주 그 자체니까요. 다만 가끔 화면에 '헤일로(후광)'를 그려 넣곤 합니다. 흔히 종교화에서 성스러운 존재 머리 뒤에 그리는 후광이지만, 저는 이를 만화나 영화에서 우주인들이 쓰고 다니는 투명한 '유리돔 헬멧'이라고 생각하며 그립니다. 차갑고 가혹한 우주 환경 속에서도 우리라는 작은 별을 보호하고 살아가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인 셈이죠.
우리 모두는 차갑고 가혹하며 텅 비어 있는 연옥 같은 우주(현실)를 떠돌아다닙니다. 때로는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다른 별을 만나 관계를 맺고, 헤어지기도 하며, 조건이 맞으면 평생을 함께 여행하다 결국 소멸하죠.
앞서 예술이란 결국 사람의 삶,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온갖 이야기를 다루는 인문학이라 말씀드렸는데, 이 우주관과 그대로 맞닿아 있습니다. 가혹한 우주 한복판에서 잠시 일어나는 사람 간의 이야기야말로, 제 생각과 작업 깊숙이 녹아 있는 가장 중요한 바탕입니다.
■ 앞으로가 더 궁금해지는 작가입니다. 어떤 그림으로 관객과 만나고 싶으신가요. 준비 중인 계획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작업 중인 오경훈 작가
솔직한 마음으로는 당연히 훨씬 더 멋지고 큰 규모의 전시로 관객들과 만나고 싶습니다. 얼마 전 DDP에서 열렸던 톰 삭스(Tom Sachs)의 전시처럼, 관객이 단순히 벽에 걸린 그림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가 만든 세계관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와 하나의 놀이처럼 재미와 몰입감을 느낄 수 있는 전시를 꼭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물론 그런 거대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가기 위해 아직 차근차근 쌓아가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아직은 무명 작가이기에 인지도나 영향력도 더 키워야 하고, 당연히 작품도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져야겠죠. 거기에 약간의 운도 따라줘야 할 테고요. 그래서 지금은 머릿속의 구상들을 하나씩 현실로 옮겨내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 내년 개최를 목표로 개인전을 준비 중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화면 속 세계관을 공간으로 확장할 거대한 설치작품을 새롭게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전에 해보지 않던 작업이라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 정확한 날짜를 잡진 못했지만, 한층 신선하고 재미있는 공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정승조의 아트홀릭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작가 소개
오경훈은 1986년 광주 출생으로 계원예술대학교를 졸업한 아티스트이다. 아크릴 물감을 활용한 회화 작업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와 감정을 탐구한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2025년 'Against the Flow'(크레인 갤러리, 서울)와 2023년 'Greetings from Paradise'(엘리제레 갤러리, 서울)가 있다. 아울러 2025년 '1996'(One Small Gallery, 보스턴, 미국)과 2023년 'Blue is the Warmest Color'(조아나 갤러리, 파리, 프랑스) 등 국내외 유수의 단체전에 참여하며 폭넓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정승조 아나운서는 CJB청주방송에서 활동하며 문화예술의 가치를 전하는 방송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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